이순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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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 되다
  • 오세홍 수필가
  • 승인 2017.06.1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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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도 이순이 되었다. 귀가 순해졌다는 공자님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역시 그 나이가 되어보니 희로애락을 잘하면 넘어설 수 도 있겠다 싶어 스스로 놀라버린다. 사랑도 미움도 넘어설 수 있고, 기쁨도 슬픔도 저 멀리 두고, 원망도 분노도 녹여버리는 것이 과연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가능한 것인지 내 자신이 궁금하다. 이 나이에 더 올라가야할 산과 넘어야 할 강, 넘어져야할 돌 뿌리와 떨어질 절벽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올라가야할 천당도, 떨어질 지옥도, 건너가야 할 피안도 없어져 버리는 마음상태. 이것이 나이 60세에 공자님이 도달하고자 했던 이순의 상태일까.

그럼에도 지나온 오월의 나뭇잎처럼 푸르러만 가던 시절, 우연히 마주쳤던 어떤 종류의 슬픔은 잘 잊히지 않는다. 어떤 감정들은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떤 이유로 마음이 소용돌이치면, 가라않은 침전물처럼 저 밑바닥으로 부터 떠올라 마음을 휘젓고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가끔 가을하늘 높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면 혹 날개 꺾였던 어떤 영혼을 생각한다. 어디쯤에서 꺾인 날개에서 새살이 돋아 힘차게 날고 있는 어느 젊은이의 영혼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오래전 산골에서 만난 그 애는 1학년 때부터 활발하여 눈에 담고 있었는데 3학년 때는 우리 반 반장이 되었다. 진학을 하였는데 잘 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홀어머니가 힘들게 벌어 생활을 꾸려나갔는데 가끔 학교에 찾아오셔서 빵과 음료수를 놓고 가시곤 했었다. 우리나라는 공부에 목숨 거는 나라라서 친구간의 우정도 점점 성적으로 갈라지고 지구 끝처럼 아이들은 조금씩 멀어져가곤 하였다.

어느 날인가 상담하던 중 그 애가 “선생님 저 시집 안 가려고요.” “저같이 공부 못하는 애 낳을까봐 겁나요.” “혼자 살려고요”  1학년 때 그 나이의 여고생처럼 맑았던 눈동자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어두워졌는데 친구들에게 점점 쳐지는 공부 때문이었나 보다. 세상의 비밀을 일찍 깨달은 그에게 난 그냥 목이 메일 뿐이었다. 양반이 없어지고 토지개혁이 되고 남여 평등이 이루어지고 산업화가 되면 다 잘 살 수 있는 줄 알았다. 누구나 원하면 하느님을 믿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공부가 새로운 신분제를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날이 온다고 말해야 하는 내가 슬퍼서 나는 속으로 울었었다.

키도 크고 활달했던 아이. 꽃이 피기도 전 어디쯤에서 차가운 날씨에 꽃망울이 얼어버린 아이. 겨우 솜털을 벗고 날개가 생겼으나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다 비바람에 날개가 꺾여버린 아이.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어디쯤에서 하늘을 날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꺾인 날개에 새살이 돋아났으면 좋을 텐데. 그리하여 달까지 별까지 날아올랐으면, 이 땅 어딘가에서, 그 맑던 눈동자로 별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면 하고 상상해본다.

가을이다. 나날이 하늘은 높아가고 점점 들판은 누렇게 물들어갈 테고 얼마 후면 하늘 이쪽에서 저쪽으로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비행기와 경쟁하며 힘차게 구만리 하늘을 날아갈 것이다. 촉촉한 눈빛으로 한참동안 그들을 바라보리라. 국화향기 아침저녁으로 코를 즐겁게 하는 요즈음, 나는 저녁 뜨락에 서서 뜨거운 가슴으로 그런 날이 어서 오기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나도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이 되었다. 그러나 이순이 되어도 기다리는 일이, 가슴 떨리는 일들이 남아있으니 좋겠다. 비록 성인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어떠랴. 차라리 희로애락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이 더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있음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나날이 계속되기를 기대해본다.

오세홍<홍성도서관 문예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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