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철과 북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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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과 북한여행
  • 허성수 기자
  • 승인 2018.06.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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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작가 이주성의 장편소설 ‘선희’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전국을 떠돌며 잎담배 장사를 하는 리원명이 함남 고원역에서 리선희라는 여인을 만나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온성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회령까지 목적지가 같아 동행하게 된 선희의 품에는 4개월 된 갓난아기 일남이가 안겨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인파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서 원명은 아기의 안전이 걱정된다. 막상 도착한 기차에 수많은 사람들 속을 비집고 겨우 올라탔지만 아기는 압사당하고 말았다. 처음 승차를 했을 때는 괜찮았지만 잠깐 달리다가 중간에 군인들이 올라타 마구 밀치고 들어오면서 아기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선희는 죽은 아기를 포대기에 감아 안고 여행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함남 고원에서 함북 회령까지 꼬박 5일이 걸렸다. 그 사이 부패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 시체를 선희는 품에 안은 채 슬픔을 삼키는 것 외에 달리 대책이 없다. 북한의 열차는 시간을 맞춰 다니지도 않는다. 전력사정이 나빠 잦은 정전으로 멈춰서기 일쑤고 하루나 이틀까지 대기하기도 한다. 여행객들은 역 부근 도시에서 민박집을 찾아 먹고 자며 언제 올지 모르는 열차를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경하게 들린다. 그렇게 기다렸던 열차가 와도 목숨을 걸고 타야 한다. 이미 초만원이 된 상태라 승차 자체가 전쟁이다. 창문으로 승하차 하기도 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열차 지붕에 올라타기도 한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5m 높이에 가설된 고압선도 주의해야 된다.

그 후 계절이 두 차례 바뀐 이듬해 봄 회령시장에서 원명은 우연히 선희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아들 일남이를 잃은데 이어 남편조차 세상을 등진 과부가 되어 있었다. 남편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다니던 공장의 기계를 뜯어서 팔아먹은 죄로 걸려 사형을 당한 것이다.

넋을 잃고 시장에 앉아 있던 선희는 원명에게 자신도 전국을 따라다니며 잎담배 장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원명 역시 아내와 이혼한 상태로 홀몸이었지만 남편 잃은지 얼마 되지 않은 과부를 동업자로 삼아 장거리를 다녀야 하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녀의 간절한 애원에 할 수 없이 원명은 선희를 데리고 전국으로 잎담배장사를 다니게 되는데 황해도 사리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열차지붕에서 감전돼 떨어져 죽는 사람을 목격한다. 객실에 들어갈 수 없어 겨우 열차지붕에 올라탄 두 사람은 산악지대 계곡을 지나는 동안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잔뜩 움츠려 있는데 한 남자가 엉거주춤 아이를 안고 벌떡 일어나자마자 용접 불꽃같은 섬광이 튀면서 감전이 됐다. 그들 곁에 있는 부인도 충격을 받고 일어났지만 같이 감전을 당해 세 식구 모두 까마득한 골짜기로 떨어져 버렸다.

강원도 산골짜기를 지날 때는 터널이 바로 앞에 다가온 줄도 모르고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면서 그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돼 공중에 날아가 버렸다. 지붕에 누워 있던 사람들은 옷과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다. 선희의 얼굴에도 그 사나이의 피가 튀어 묻었다. 이렇게 기차지붕에서 위험천만한 여행을 한 나절도 아니고 여러 날 낮과 밤을 달려야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곳이 북한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북한 민중의 모습을 작가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음 주에 6·25전쟁 68주년을 맞게 된다. 전후 남한은 고도로 발달된 사회간접자본으로 고속철을 타면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지만 북한은 철도시설이 매우 열악해 장거리 여행은 큰 모험이다. 평양은 매우 번듯한 고층빌딩을 자랑하지만 그 밖의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말할 수 없이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최근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는 조건으로 남북간, 북미간 화해무드로 가고 있는데, 결코 위장된 평화공세가 아니라면 김정은이 부러워했던 고속철 공사가 속히 이뤄져서 남북한 백성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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