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와서 효도하고 나아가서 공손하고 어진 이와 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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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서 효도하고 나아가서 공손하고 어진 이와 친하게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1.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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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공자 왈 “제자 된 자의 도리는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공손하고, 행실에는 떳떳함이 있어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특히 어진 이와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을 때는 틈틈이 선현들이 남긴 글을 읽어 도리의 당연한 모습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학이편’은 공문(孔門)의 교칙이자 교육 과정을 모아 놓은 곳이다. 이 장은 그 중에서도 배움의 차서(次序)에 대해 밝힌 장이다. 무엇을 ‘배움’의 으뜸으로 삼아야 할까? 처음 배우는 사람은 무엇을 배움의 기초로 삼아야 할까? 유학에서는 개인이 지닌 지식이나 능력보다 사람됨됨이를 중시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사람됨의 근본 도리를 알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람다움은 귀신도 알아본다고 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은데 제사(禮樂)는 지내서 무엇하랴?’ 그래서 사람다움을 이루는 것을 배움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군자는 근본을 다지는 데 힘을 쓴다. 근본이 서면 도(道)는 저절로 나온다.’ 그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공부를 말한 것이 바로 이 장이다.

첫째, 그것은 우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제(弟)’는 ‘뒤에 태어난 자’를 뜻하는 글자다. ‘선진(先進)’에 대해 ‘후생(後生)’을 뜻한다. ‘자(子)’는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 뜬 글자인데, 보통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양’을 본 뜬 ‘여(女)’에 대해 사내인 ‘남자 아이’를 뜻하는 글자로 많이 사용됐다. 합해서 ‘어린 사람’, 전(轉)해 ‘배우는 자’라는 뜻이다. 그 제자(弟子)된 자가 힘써야 할 본분(職)이 있다. 들어와서는 효(孝)하고 나아가서는 제(悌)하는 도리다. 효(孝)라는 글자는 아들 된 자(子)가 늙은이(&#32770;)와 함께 있는 형상이니 부모(조상)와 함께 거주하며 부모와 조상을 잘 섬기는 모양이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먼저 맺게 되는 관계가 부자 관계다. 그 ‘정(情)’이 보통의 정과 달라서 천하 윤리의 표본으로 여겨져 왔다. 그 근본을 모르는 자는 무엇을 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제(悌)는 ‘뒤에 태어남’ 곧 ‘차례’를 뜻하는 제(弟)와 마음을 뜻하는 심(&#24516;)이 결합된 글자다. 차서(次序)를 중히 여기는 마음, 요컨대 ‘아랫 사람이 손 위 사람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부모(父母)가 있으면 형제(兄弟)도 있기 마련이다. 그 형제간의 차서를 정한 것이 바로 ‘제’다. 합해서 읽으면 집에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잘 봉양하고 밖에 나가서는 부형을 모시는 마음으로 장자(長者)를 잘 모시라는 것이다. 제2장에서 말한 ‘효제는 사람다움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孝悌也者, 爲仁之本與)’는 가르침을 이와 같은 말로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농업이 주요한 생산수단이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사람의 힘에 의존했다. 이때 사람들을 끈끈하게 붙잡아 준 것이 바로 ‘정(人情)’이다. 정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부락에서 오랫동안 도덕이요 윤리로서 기능했다. 정의 바탕에는 ‘사람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다움의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그 정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 살며 정을 나누는 것, 이것을 최고의 이상이요 가치라고 생각했다. 마을은 그런 집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런 집과 마을을 하나로 묶어주는 데는 ‘효제’보다 더 나은 도덕이 없을 것이다. 자연적 관계에 바탕하고 있고 모두가 바라는 이상(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도덕이 이상적으로 펼쳐진 마을의 정경이 ‘입즉효 출즉제(入則孝 出則悌)’의 모습이다. 옛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소학’과 ‘통감’을 즐겨 읽었다. 소학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익혔고 통감을 통해 인간의 도리가 펼쳐진 세상을 봤다. 그래서 정쟁(挺爭)을 할 때도 인간다움의 도리를 잃지 않으려 했고 이에 바탕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 소학과 통감에서 가르친 것이 바로 이 ‘入則孝, 出則悌’의 도덕이다.

둘째 배우는 자는 떳떳한 마음과 성실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근(謹)’이라는 말은 ‘말’을 뜻하는 언(言)과 ‘적음’을 뜻하는 근(僅)이 합쳐진 글자다. ‘말을 충분히 하지 않고 끝낸다’는 뜻인데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함이 있고 행동은 조금만 해도 그 뜻이 드러난다. 함의는 언행을 삼가라는 뜻이다. 그 행실에 ‘떳떳함’이 있는 것, 이것이 ‘근’의 의미다. 한편 ‘신(信)’은 ‘사람이 말했다’는 말에서 온 글자인데 사람은 말을 하면 반드시 이행하게 돼 있다는 뜻에서, 믿을 만한 것, 신뢰할 만한 것, 성실한 것, 옳은 것, 신앙, 맹세의 의미로까지 어의(語義)가 확대됐다. 오늘날에는 말과 그것에 담긴 내용(실재)은 이론과 실제의 관계처럼 별개의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예전에는 말에는 그 실재가 포함돼 있다고 여겼다. 합해서 읽으면 행동에는 떳떳하게 하고 말은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에 거리낌이 없으려면 사리사욕이 없어야 한다. 매사에 공명정대해야 한다. 그래야 본인에게도 떳떳하고 남에게도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천만 인이 와서 다그친다 해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정(人情)’이 강조되는 사회는 따스함이 있는 한편 시비(是非)를 논할 때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예가 있다. 이때 필요한 도덕이 바로 이 ‘근이신’이다.

셋째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다운 사람을 가까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공문(孔門)에서 생각한 정치는 오늘날의 정치와 달랐다. 오늘날의 정치는 정치의 기능적인 면에 주목한다. 가령 정치가의 리더쉽, 당면한 문제의 해결, 사회통합, 대외관계, 국가의 미래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정치가의 본분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이다. 정치가는 ‘기술인’ ‘지식인’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문에서 생각한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를 구현하는 행위, 궁극적으로는 ‘도덕’이란 말로 대치해도 무방한 행위의 것이었다. 곧 인류애를 구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혹은 그것이 펼쳐지는 장(場)을 정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공문에서는 정치와 도덕의 경계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치적 행위와 도덕적 행위는 거의 동일시됐다. 정치가 도덕이고 도덕이 바로 정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에서는 정치의 담당자가 도덕이 출중한 성인군자일 수밖에 없다. 정치계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자가 자신의 뜻(보편적 인류애)을 펼쳐나가는 장이고 출사(出仕)는 그것을 펼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범애중(汎愛衆)’이란 말의 의미다. 한편 대중에 대한 사랑에도 차서(次序)가 있다. 사람다운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한다. 이 ‘친인(親仁)’이란 말에는 제1장에서 말한 붕우(朋友) 곧 함께 ‘인(仁)에 들고자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널리 대중을 사랑한다 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다. 이때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운 역경이 닥치더라도 힘을 합쳐 함께 나아갈 수 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고 그를 본받아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 넣을 수도 있다. 이른바 ‘과화존신(過化存神)’이라는 말이 있다. ‘성인(聖人)이 지나는 곳은 교화되고, 머물러 있는 곳은 신(神)처럼 감화된다(夫君子所過者化, 所存者神)’는 뜻인데 어진 이를 가까이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감화돼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넷째 성현이 남기신 글(文)을 읽어 도리의 당연함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보통 이 문구를 ‘앞에서 말한 모든 일을 다 하고도 여유가 있으면 그때 가서 文을 읽으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제자 된 자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문(文)을 먼저 공부하게 되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학문에만 치중하게 돼 결국 자신을 닦는 기회를 망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문장의 본의를 놓칠 수 있다. 자기 수양과 ‘문’을 통한 학습은 병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 수양 없이 ‘문’에 대한 학습에 들어가게 되면 문의 내용을 감지(感知)하기 어렵다. 문을 읽더라도 형해화 된 지식만 얻게 될 뿐이다. 또 문에 쓰인 것만을 이론적으로만 고찰할 뿐이기 때문에 사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지리한 논쟁에 빠질 수 있다. 결국 지식 자랑으로 점철되다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날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에 대한 학습 없이 자기 수양에만 전념하게 되면 사적인 영역에서 도덕을 수행하는 데 그치거나 혹은 자기만족에 빠져 어리석고 견문이 좁은 사람을 면키 어렵다. 도리의 당연함을 깨닫기는커녕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른 채 자기가 체험한 것만 옳다고 여겨 시비(是非)를 마음대로 농단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무조건 이단(異端)이라고 한다.

유학이 위대한 점은 개인이 이룬 도덕적 수양을 보편적 인류애의 구현 곧 인간다운 사회를 이루는 데 사용하라고 가르친 데에 있다.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내지 조건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서 얻은 체험을 인류 사회에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에 대한 학습을 수행해야 한다. 문에는 사리의 당연함 곧 도덕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와 실제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을 읽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 목표가 정해지고 그 목표를 이뤄야겠다는 의지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 ‘행유여력 즉위학문(行有餘力 則爲學文)’은 앞에 열거한 도덕을 모두 행하고도 남는 힘이 있을 때 文을 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덕을 행하는 틈틈이 文을 읽어 도덕을 행하는 이유를 깨달으라는 뜻이다. 사람 됨됨이보다 지식과 권위를 앞세우는 세상이다. 평생을 ‘도필지리(刀筆之吏 칼로 목판에 문서를 새기는 일을 하던 천한 벼슬아치. 관청에서 문서나 만지고 형벌을 주무르며 사람들에게 위협이나 가하던 무리를 뜻함)’로 살아온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고, 그런 자리에서 편안히 지내다 높은 자리로 영전한 사람에게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쏟아 붓는 세상이다. 인간다움은 평생을 연마해도 이루기 어렵다. 하물며 그에 반하는 능률과 실질을 이루려고 평생을 발버둥 쳤던 사람에게 있어서랴? 그런 사람에게 인간다움의 도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리의 당연을 아는 자라면 그런 자리에 앉으라고 애원해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사람에 의해 이뤄지고 변해 간다. 공자는 그런 세태가 오는 것을 걱정해 이러한 교훈을 남겼다. 지식과 능력을 쌓기보다 인간다움을 이루는 데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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