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에 따르면 남쪽 지정구역 내부는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고려초로 추정되는 토성과 구상유구, 수혈유구등이 발굴되어 국가지정 문화재 등록을 신청한다는 방침으로 홍성군의 잃어버린 역사 찾기와 홍주성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전망이다.
당초 군은 홍주성이 1,772m에 이르는 읍성이었으나 현존 성곽과 관아건물에 대하여만 사적 제23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고, 훼철된 성곽지역은 문화재 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점을 이유로 들어, 홍주성 북측 및 동측 훼철 성곽 962m구간 및 남문 지역 성내구간 지정구역 52필지 6,819㎡ 보호구역 267필지 69,863㎡을 추가지정으로 신청했었다.
국가 시범사업인 지역종합개발사업(2007. 7. 10 지구지정 고시)이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추진되는 사업으로 이미 개발계획수립이 착수된 상태로써, 당해 지구와 추가지정 대상지가 중첩되어 사업의 원할한 추진과 홍주성 유적을 동시에 보호하기 위해서는 문화재구역 추가지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문화재신청이 반려된 홍주성 북측 및 동측 훼철 성곽 962m 구간에 대한 사유로 “추정 성곽 지역은 개발이 완료되어 학교 및 주택지로 이용되고 있어 현 건물군에 대한 정비계획 수립 및 발굴조사 등을 통하여 유구의 잔존여부 및 성곽형태에 대한 명확한 규명 후에 지정여부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훼철된 성터는 1910년대 일제에 의해 작성된 지적도면상으로도 성곽 및 치, 서문지, 북문지의 위치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지적이 드러나 있고, 실제로 성돌이 땅속에 묻혀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홍주성은 1972년 10월 성곽과 조양문, 아문 31필지 16,298㎡이 1차로 문화재로 지정됐었고, 성곽 74필지 20,710㎡이 1979년 7월 2차로 지정, 3차인 1997년 4월 2필지 10,051㎡이 추가로 지정됐었다. 사적 제231호이다.
홍주성(洪州城)
■ 연혁
처음 성곽을 쌓은 기록은 없다. 다만 최초로 성의 주위가 1,300척의 토성으로 성첩이 400에 불과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백월산 중복(中服)에 해풍현(海豊縣) 고을이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고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에 성을 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서편 수문에서 동편 수문을 거쳐 금마천으로 흘러가게 하고, 동서북 세 곳에 문을 다시 세웠다.
남문은 홍예문(虹霓門)으로 세웠고 경오년 2월 27일 준공한 다음 조정에 보고하였다. 동년 10월 15일에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 이라고 각각 명명하였다. 남문은 문루가 없고 그 외에는 모두 문루가 있으며 조양문의 문비는 철판이었고 서북 남문의 문비는 판목이었다.
예로부터 풍객들이 홍주읍은 천고락지(天鼓落地) 형이라고 해서 그랬는지, 병화가 자주 있었는데, 후백제와 고려의 대전을 위시하여 16차에 걸친 왜구의 침공, 최충헌의 차자 최향의 반란, 선조 때 이몽학의 반란, 갑오 때 동학란, 병오의병 항일전은 홍주만이 겪은 전란이다.
그러나 홍주성의 성곽은 의연하였는데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홍주에 이주한 일본교민이 1913년에 서문을 철폐하였고, 1915년에는 북문을 철훼한 다음 동문마저도 철훼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곽은 곳곳에서 헐리기 시작했다.
산성은 주위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많은 구간이 전면 훼철되고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중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 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8.15 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홍주성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1972년 10월14일 산성, 조양문, 홍주아문 등을 사적 231호로 지정하였고, 1973년에 국비 2백5십만원을 투입하여 조양문 주변의 가옥 37동을 매입 철거하고 토지 2.271m을 매수하였다.
1975년에는 국도군비 1천4백4십1만8천원을 들여 홍주동헌의 해체공사를 한 후 1978년에 군비 1천5백만원을 들여 현재의 모습을 복원하고 홍주아문도 보수하였다.
한편 1978년 10월7일, 홍성지방에 강도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됨을 계기로 획기적인 보수정화 계획을 수립하고 국비 1억4천6백만원을 지원 받아 성곽주변의 가옥 64동을 철거하고, 대지 3천4백4십6평을 매수하였고, 1979년부터 홍주성 보수정화 계획을 확정하여 810m의 성곽을 복원, 성곽외부 4천7백9십평의 정화와 아울러 2.5m 폭의 산책도로 개설 등의 공사계획을 수립하여 국.도.군비 4천5백만원을 투자 성곽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1983년에는 국.도.군비 3천만원을 투입하여 성곽 주변정리(잔디, 안내판, 표석 설치 등)를 완료하였고, 최영 장군, 성상문 선생, 한용운 선사 및 김좌진 장군의 흉상을 세워 구국충절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 조양문, 동문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요,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을 석석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서문은 봉아의 8칸을 세워 망월문이라 하였고, 북문도 서문과 같은 규모로 봉아 오양의 8칸을 세워 망화문이라 하였으며, 남문은 지형이 등고하여 자연적으로 국방의 요새가 되어 홍예문을 세웠고, 동문은 홍주의 관문인 관문인 관계로 서북문과는 달리 외구를 삼포로, 내구를, 오포로 11동 12칸의 크고 정교한 문루를 세우고 망일문이라고 불렀다. 그 후, 대원군은 서문에 경의문, 북문에 망화문, 동문에 조양문이란 친필로 쓴 편액을 각각 하사하였다. 이 편액들은 병오와 6·25양난 때 망실되었고, 현존한 문액은 김희영의 글씨이다.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던 곳으로, 갑동오학란 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하였다. 병오년에 이나라의 우국지사들이 왜병과 싸우다가 적탄에 철비가 폭파되고 서성문을 쌓은 돌이 어긋나는 성처를 입기도 하여 지금도 자세히 살펴보면 , 그때 당시의 광경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이나라의 국권이 없어지자 이곳 홍성에도 많은 일본인이 이주하였다. 그들은 1913년에 서문을 철거하고 다음해인 1914년에 북문을 철거한 다음 다시 동문도 철거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홍성읍 민들의 경사적인 반대로 동문만은 겨우 철거를 면하였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 수록 닥쳐오는 풍우와 등한하였던 관계로 문루가 파손되어 갔다. 홍성군수 임연상이 1917년에 군내 각 호에서 5전씩을 연출하여 보수하였고, 1959년에는 홍성군 교육구가 80만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보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신광청 군수가 군비 50만원을 투입하여 단청을 가시 하였다. 그 후로. 걷잡을을 수 없이 퇴락하여 조영호 군수가 문화공부에 여러 차례 상신하여 1973년 8월 문화재관리국 으로부터 홍주성자와 조양문, 홍주아문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성곽의 일부와 홍주아문을 보수하였다.
이어서 조영호 군수는 조양문의 영구보존과 시가지를 정리할 계획을 세우고 정부에 건의하고, 마침내 1974년 정부의 승인들 얻어 문루를 중심으로 반경 30m 내의 가옥 20동 (건평 368평), 대지 418평을, 1,921만원에 매수하여 로타리를 조성하고, 국비 1,131마원과 도비 350만원, 군비 1,831만원으로 해체하여 복원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다. 1991년도에 이상선 군수가 도비와 군비를 들여 보수하고, 조양문을 중심으로 원형 석조물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 경의문, 서문
홍주성 서쪽에 있는 문을 경의문이라 했다. 양광이 추곡시를 여물게 비친다는 뜻의 문 또는 크게 의로운 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문은 1823년 이헌규 목사가 중수하였고, 1870년에 한응필 목사가 문루를 개축하였는데, 대원군이 경의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동학난과 병오향일전 때, 문액이 파손되고 일정 때에 와서 훼철되었다.
△ 홍예문, 남문
홍주성의 높은 지대에 남문이 이었다. 남쪽에서 계단으로 올라 오는 지경이 되기 때문에, 이 문루는 아취형으로 구성하였다. 홍예문의 모양은 문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 같이 반원형이 되게 만들어져 있다. 1823년 이헌규 목사가 세웠으나 훼철되었다.
△ 망화문, 북문
홍주성의 북문이 망화문이다. 사대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였기에 중국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화문이라 했다. 1823년 이헌규 목사가 중수하였고 1870년에 한응필 목사가 문루를 신축하였는데 대원군이 망화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동학난과 병오항일전 때 문액이 파손되고 일정 때에 와서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