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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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있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06.0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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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이하 코로나)라는 사상 초유의 재난이 2020년을 덮쳤다. 코로나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얼마 전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올해가 가기 전에 접종이 끝나면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는 말이 긍정적인 이야기도 들리지만 미래의 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여전히 불안하다. 누군가는 코로나를 전무후무의 재난이라고 했지만 이와 비슷한 재난이 앞으로 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무후무라는 단어는 적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출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처음’이라는 용어가 현재의 코로나 상황을 보다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코로나 이후,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 가까이 선생이라는 직업 탓에 학교라는 공간에서 머물렀다. 남들보다 늦게까지 대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 보낸 기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다. 학교는 삶에서 가장 익숙한 공간이고 학교 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 일상이 깨졌다. 코로나 때문에 말이다.

사실 교실에서 학생을 만나는 게 늘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생을 만나는 것은 삶의 큰 부분이자 일상이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학생과 선생이 교실에서 만나는 일은 당분간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바뀌더라도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된 일상, 즉 학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불안감보다는 당혹감이 앞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쩌면 이게 일시적인 재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혹감을 넘어섰다.

가르치는 교과목이 이론 수업으로 범박하게 분류되기에 수업은 거의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처음에는 녹화 수업만 하다가 나중에는 실시간 수업과 녹화 수업을 병행했다.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나 온라인 수업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지만 운 좋게도 대부분 사소한 문제라서 무사히 잘 넘어갔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온라인 수업을 남들보다 잘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잘 넘어간 것은 모두 학생들의 너그러움 덕분이다. 이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수업을 끝까지 참고 들어준 학생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지 아니면 덕분이라고 말해야 할 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코로나로 꽤 많은 시간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남들보다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고 크게 좋아하는 것도 없다. 열정과 의욕이 남들보다 한참 부족해 어떤 일을 오랫동안 꾸준하게 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고 잘하는 운동도 없다. 누가 보더라도 참 한심한 인생이다. 그나마 꾸준히 하는 일을 하나 꼽으라면 책을 읽고 읽은 책에 대해 쓰는 일이다. 신기하게도 이 일은 거의 1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컴퓨터에 ‘최근에 읽은 책들’이라는 폴더를 만들고 거기에 매월 읽은 책의 목록을 정리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읽은 책마다 독후감 비슷한 걸 쓰기도 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게으른 탓에 독후감 쓰기는 얼마 가지 못했고 대신 읽은 책의 목록만 순서대로 정리했다. 그래도 간혹 생각이 떠오를 때는 글을 끼적거렸다. 그렇게 끼적거린 글들은 나중에 읽어보았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엉망투성이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졸저 《무한독서(2019)》와 《조금 삐딱한 책읽기(2020)》, 그리고 곧 출간을 앞둔 《미래는 꿈꾸는 대로 온다》는 모두 이 조잡하고 하찮은 엉망투성이의 글에서 출발했다. ‘코로나, 그 후 1년’을 맞이하며 ‘최근에 읽은 책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책 몇 권과 그에 따른 몇 가지 단상을 함께 풀어 보려 한다.

코로나가 있기 전 지역 도서관이나 중·고등학교에서 가끔 독서 토론과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보통 인문학 강좌는 특정 주제에 대한 발표와 질의응답으로 진행된다. 질의응답에 할애된 시간이 충분치 않기도 하지만 질문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강좌의 대부분은 발표로 채워진다. 독서 토론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먼저 진행자가 지정 도서와 작가에 대에 간단히 배경지식을 설명하면 참가자들이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한다. 토론 진행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필자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간혹 책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어쭙잖게 떠든다. 어떤 때는 주책없이 토론자들보다 더 많이 떠들어 토론 중에 혹은 토론이 끝난 뒤 가끔은 민망하기도 하다. 사실 독서 토론의 진짜 즐거움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질문이 주제에서 벗어나거나 질문의 맥락이 실제와 달라 종종 당황하는 경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신선한 지적 자극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독서 토론을 하면서 그 점이 가장 좋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문에 거의 모든 독서 토론이 중단됐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과 독서 클럽을 이어 가게 됐다. 전해 듣기로는 예년에는 오프라인으로 토론을 진행했는데 지난해부터는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정규 수업에서 이미 줌과 그 밖의 비슷한 수업 도구를 통해 학생들을 실시간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정규 수업이 아닌 독서 토론에서 학생들과 실시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처음에는 설레고 긴장됐다.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 책은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프로이트의 의자》, 《유투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공정이라는 착각》이다. 학생들이 투표를 통해 책들을 선정했고 토론 주제 또한 직접 정했다. 《공정이라는 착각》은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이미 읽었지만 나머지 책들은 이 독서 토론이 없었다면 아마도 읽지 않고 넘어갔을 책들이다. 토론 때문에 읽었지만 그 덕분에 많고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술취한 코끼리는 한마디로 말해 ‘행복의 부재에 대한 슬픈 증명’이다. 티벳 불교 승려인 저자는 집착과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단맛에 이르는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라고 일갈한다. 살다 보면 행복을 갈망하던 마음이 오히려 독이 되어 고통스럽게 한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국 그 안에 갇히고 만다. 고통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노력 모두 ‘불만’과 ‘불안’에서 비롯된다.

원래 ‘인간은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를 꺼린다.’ 코로나는 한국 사회에 내재된 불만과 불안을 수면 위로 한껏 끌어올렸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프로이트의 의자》는 마치 10년 후의 미래를 선취한 듯 현재의 한국 사회 또는 한국인의 불만과 불안의 양상과 그에 대한 원인을 세밀하게 살핀다. 현재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폭력으로 연결된다. 그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폭력과 같은 상징 폭력으로 확장된다. 저자는 폭력을 다스리는 데 개인적인 노력으로만은 부족하고, 사회적인 제도의 뒷받침과 공동체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코로나는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응축된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불만은 때로는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라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만 사회의 갈등과 개인의 분노라는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가 가져온 불만은 후자에 가깝다. 코로나는 기성세대보다도 젊은 세대의 분노를 끌어냈는데, 젊은 세대들의 분노는 기성세대의 분노보다 훨씬 더 크고 휘발성이 강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며 경쟁에 내몰린 젊은 세대들은 현재에 대해 불만도 더 크고 미래에 대해 더 불안해한다. 한때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느끼는 불만과 불안을 잘 예거한다. 젊은 세대들의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정의’와 ‘공정’의 문제로 곧장 연결된다.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2020)》에서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능력주의는 공정하게 작동하는가?’ ‘공정함이 곧 정의인가?’ 등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다시 말하면 그는 ‘능력주의가 과연 정의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그가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에 방점을 찍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따뜻한 공동체의 첫걸음은 서로에 대한 배려다.

리터러시는 사전적인 의미로 ‘읽고 쓰는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리터러시는 어떤 글을 읽어 키운 능력을 다른 글을 읽을 때 자동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하지만 리터러시는 점점 개인적 성향의 산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주관적인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고 모든 말과 글을 그 기준에 맞춘다. 그 기준에 맞으면 리터러시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리터러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진정한 리터러시 활동은 “어휘의 다양성이 아니라 의미의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행위”이어야 한다. 즉 리터러시는 혐오의 도구가 아니라 성찰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럴 때 앞에서 언급한 정의와 공정의 길, 더 나아가 좋은 삶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재난을 겪으며 정의와 공정, 더 좋은 삶을 역설하는 게 순진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끝이 아직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그 끝이 어디고, 그 끝이 언제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 끝은 결국 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끝이 온 다음에 다음을 맞이하기보다는 끝이 오기 전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코로나, 그 후 1년’을 책과 함께했다. 잘하는 것도 없고 특별한 취미도 없어 책 보고 영화 보고 가끔 글을 쓰면서 ‘코로나, 그 후의 1년’을 견뎠다. 책을 읽으면 책 속에서 깨우침을 얻고 행동을 바꿔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 자신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책이 없었다면 내 지금의 일상은 훨씬 더 무너졌을 것이다. 아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삶은 즐기고 이끌어가는 것이지만 또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삶을 버티고 견디는 데 책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코로나 이후의 삶에서도 책은 그럴 것이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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