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예찬, 순례자들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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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순례자들의 마음
  • 최교성 세례자 요한 <홍주성지 전담 신부>
  • 승인 2022.01.13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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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걷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순례자들도 역시 늘어나고 있다. 걷기는 인생길의 축소판이라 여겨진다. 《걷기예찬》(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김화영 옮김)이라는 책이 있는데, 걷기에 대한 바이블이라고 일컫는 영적인 책이다. 몇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걷는 것은 잠깐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심을 당당하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혹은 자신보다 앞선 수백만의 선배들에 상징적으로 합류함으로써 오늘날의 삶의 리듬을 끊어버리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다.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다듬고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인내를 배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자기 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 한발 한발 거쳐 가는 길은 절망과 권태를 불러일으키는 미로이기 쉽지만, 지극히 내면적인 그 출구는 흔히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시련을 극복했다는 느낌 혹은 희열과 재회하는 순간이다.

수많은 발걸음들에 점철된 고통은 세계와의 느린 화해로 가는 과정이다.
걷는 사람은 낭패감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계속한 몸을 이루고 사물들과 육체적 사람의 마음을 가다듬고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 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춤의 럼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 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접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통찰력 있는 걷기예찬이란 말인가? 과연 걷기의 바이블답다. 인생에서 자기완성은 혼자 해야 하는 길이다.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홀로서기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홀로서기는 인간 완성의 단계이자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홀로서기는 혼자 지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세상과 사람들과의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다. 성서에서 사막은 정화를 상징한다. 수도자들이 사막으로 나아가 자신 안에 있는 진리를 보기 위해, 내면의 길로 들어간다. 피정을 통해 진아를 발견하게 된다. 이 길에서 침묵은 절대적이다.

그래야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뚫리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피하지 못하는 코로나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필자는 코로나 시절에 순례자도 버스도 다 끊기고 나서, 즉시 내적성찰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4~5시간을 산행과 바닷가로 김밥과 도시락을 챙겨들고 세상을 등지고 침묵을 사랑하는 은수자로 거듭나는 은총의 시간을 가졌다. 가톨릭의 사제 수도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철저하게 혼자 죽어간다. 저승으로 가는 과정을 보면 제각각이다. 가톨릭의 사제로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wl움이 될 것은 뻔히 내다보이는 일이리라…

중환자실에서는 골프 치는 벗도, 산책길에서 서로 시시덕거리고 핫도그를 함께 먹던 친구도, 함께 맛 집을 찾아다닌 벗도 함께할 수 없게 된다. 죽을 때는 다 필요 없다. 마치 그분 창조주와 셈을 나누듯이 혼자 해야 하는 마지막 숙제를 해야 한다.

사실, 옆에 누가 온다 해도 철저하게 혼자 맞이해야 할 나만의 마지막 숙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법칙을 발견한다. 인생에 공짜 없다고 했던가? 사제의 눈에는 보인다. 악인은 너무 괴롭다. 이승이 전부인 것으로 간주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죽는다’라는 최고의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죽음 연습을 했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부조돈 주러 갈 때가 전부였을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식은땀을 흘린다. 착하게 살던 사람들은 착하게, 감사하게, 신을 찬양하며 고향의 품속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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