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 대해
상태바
흙에 대해
  • 최윤종 독자·칼럼위원
  • 승인 2022.07.08 08:3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주중학교 재학시절 나는 국어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느 날은 밭에서 뽑아온 팔뚝 만 한 대파 한 묶음을 어깨에 메고 선생님의 자취방에 찾아가 뵙고 반찬을 해 드시라고 부끄러움을 감추며 건네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싱싱한 대파를 반가워 하시며 흙이 참 좋은데서 자란 파라고 감탄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흙을 발로 밟고 흙 위에 살지만 언젠가는 흙으로 내려간단다.” 그 말씀에 흙에 대한 존엄함 마저 생겼다고나 할까? 조금 더 철이 들어 군 제대를 하고서도 친구와 함께 서울 종로 체부동에까지 선생님 댁을 물어물어 찾아가 뵙고 흙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성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셨고(창2: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中)’고 기록하고 있다. 흙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과거임과 동시에 미래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인류 역사 속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흙에 대한 숭고함은 항상 있어 왔을 것이다.

한자로 ‘생각할 사(思)’는 밭과 마음의 결합이다. 흙과 친숙한 마음, 여기에서 ‘찐 생각’(?)이 나온다고 해석해보면 어떨까? 인간을 일컫는 ‘휴먼(human)’은 땅과 흙이란 뜻을 가진 ‘흄(hum)’에서 온 말이다. 이처럼 흙은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결이다.

흙 한 줌이 있기까지 수백 수천 년의 낮과 밤이 지났고, 기가 막힌 절묘한 생명의 스토리가 얽히고 설켜 그 속에 주저리주저리 담겨 있다. 또한 일정량의 흙뭉치에는 인류의 숫자 이상의 많은 미생물들이 숨쉬고 있다. 흙이 키워준 곡식과 과일은 그대로 인간의 입을 만족케 하고 우리들의 가족과 이웃들이 삶을 살아내는 힘으로 발산된다. 또한 흙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떠받쳐 주는 버팀이 되기고 하며 아늑하게 품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이 흙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감지한 이가 비단 필자뿐일까? 사람들이 많은 곳일수록 흙은 몸살을 앓는다. 쓰레기(특히 비닐과 플라스틱 그리고 음식물 찌꺼기), 인간의 편리를 위하는 여러 약물, 각종 세제 그리고 정화되지 못한 공장 폐수, 무분별한 콘크리트의 사용 등이 그 요인이다. 아마도 이대로 가다간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책망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 각자 스스로가 다음을 도모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흙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자. 모든 것이 그렇듯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더 존중하게 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 지지가 생긴다. 흙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반임으로 고마운 마음과 태도를 갖자. 

둘째로 미안한 마음을 갖자. 어쩌면 우리는 알 빼먹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대자연이 순환하면서 흙이 가지는 넉넉함이 다시 유지가 되리라 낙천적 기대도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이기성으로 인한 오염 발생은 자연정화 과정의 순환 일부를 방해하고 있음이 명백하니 당연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셋째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즉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 어떤 대안들이 나온다. 무한 가능성을 지닌 학생들은 학생답게 꿈을 꾸고 자신의 재능을 키워 흙을 살리는 일에 일조하는 인재가 나오면 좋겠다. 지금의 정책을 펼치는 이들은 보다 더 진중한 의식을 가지고 대안적 연구를 활발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흙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생활 깊숙한 곳에서 흙에 대한 관심을 먼저 갖고 애정을 가짐으로 흙의 몸살을 덜어주고 살림에 앞장서야 한다.

넷째로는 어려운 마음을 갖자. 불편한 것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이다. 지나친 인간의 편리만 추구할 때 상대적으로 흙은 더 힘들다. 따라서 지극히 평범한 우리가 서로서로 일상의 생활 깊음 속에서 조금 더 불편을 감수하며 오염 발생을 최소화하는 비범한 사람들이 되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할 수 없어도 지금 여기에서 ‘어떤 것’은 할 수 있는 법이다. 완벽을 주장하기보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더디게 해보자.

요즘 몇 일간 비가 내렸다. 가뭄이 이어지더니 오래간만에 내리는 시원한 해갈의 빗줄기였다. 덕분에 우리들의 홍성천에도 생기가 도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는 물고기를 잡으러 온 아이들이 바지를 적신 채 신나게 노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돋았다. 천변 청소로 허벅지까지 물에 빠지며 걷는데 모래를 밟는 상쾌함에 제법 따가운 햇볕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주시하게 된 것은 작은 모래톱이다! 군데군데 시커멓게 이물질들이 모래를 덮고 있다가 빗물에 닦기고, 흐르는 다량의 물줄기에 씻기고 나니 이렇게 깨끗하고 고운 모래의 수줍은 속살이 예쁘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행동해야 할 차례이다. 흙은 생명이고 생명을 살린다. 흙이 깨끗하면 사람도 살기 좋다. 사람 살기 좋은 홍성!


최윤종 <홍성침례교회 담임목사·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만식 2022-07-08 14:55:35
홍주중학교 국어선생님 존함이 어찌 되실까요???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