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곡’- 달밤에 콩밭 매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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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 달밤에 콩밭 매신 어머니
  • 최홍이 서울시의회 교육위원장
  • 승인 2012.10.1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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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중 어느 해였을까, 자다 깨어보니 어머니 자리가 비어있었다. 졸린 하품을 하다가 찌그러진 안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마당이 대낮같다. 사랑채 지나 뒷간에 가 봐도 없다. 누나들이 뒷간 귀신 나온다고 겁 줘서 2학년 초등생이면서도 밤에 똥 누러 가게 되면 누나 하나를 데리고 가, 끝 날 때까지 밖에 서있게 했다. 그런 뒷간을 혼자 들어가는데 별로 무섭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바깥마당을 지나 무엇에 홀린 듯 사래 긴 등성이 밭쪽으로 갔다. 지장풀에 맺힌 이슬을 털며 밭에 이르니 저만큼에서 흰 수건 쓴 머리가 움직였다. 어머니가 콩밭을 매고 있었다. “어머니!” 불렀다. 뒤돌아보던 어머니가 이윽고 손을 들어 돌아가라 손짓했다. 그리곤 콩 포기 사이사이로 웃자란 바랭이나 쇠비듬 풀을 우둑우둑 뜯어내며 앞으로 뭉쳐나가지 않는가. 그 밤 달빛은 왜 그리도 맑았는지. 그때 어머니 나이 마흔 넷쯤이었을까.

1958년 홍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병약한 몸이 집에서 빈둥거렸다. 홍성고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 날 서무실로 찾아갔었다. 몇 달만 외상으로 다니게 해주면 어떻게든 ‘납부금’을 마련할 테니 도와달라고. 그런데 애걸하는 내 목소리가 자꾸 목구멍으로 기어들지 않는가. 서무직원이 껄껄 웃으며 그래 그러마,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놨다. 그 뒤 반편성에서 제외된 걸 원망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무슨 부탁 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그 3년 전 중학교 입학시험 보러 나서던 아침, 어머니가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뚝 떨어져라 하던 말도 뼈에 박혔을 뿐 원망스럽진 않다. 남들은 합격하라고 찰떡을 해주고 엿을 사 붙이는데 오죽하면 그랬을까, 어린 나이에도 나는 어머니의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졸업한 그 봄, 중학교 교과서를 후배에게 팔았다. 그 몇 푼으로 광천장에서 산 가재(자)미 두 마리를 코 꿰어 들고 와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이상하게 누나들은 보이지 않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금새 굳어지더니 짱짱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다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가. 새끼들 수북이 내질러 놓고 워디로 갔어? 나 이것들 하고 워떻게 살라구 먼저 갔어? 남편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 소리 죽여 울지 않는가. 책 판 돈으로 어머니 생신을 차려드리려던 음력 삼월 초이레는 그렇게 열일곱 살의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음각으로 남아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되면서 동네 몇 사람들이 지서로 끌려갔다. 그 대부분이 즉결처분되어 살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업히어 돌아왔다. 남편이 보도연맹원으로 희생된 그 아내가 ‘인공’ 때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남편 원수를 갚으려고 날 뛰지 않았느냐? 네가 한 짓을 불어라. 불면 살려주고 불지 않으면 죽는다며 모진 고문과 닦달을 해댔단다. 다른 이들은 비명소리와 공포감에 지레 겁을 먹고, 매와 고문에 못 이겨 하지 않은 일도 했다고 자백(?)한 결과, 시신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새끼들과 살려고 밭이나 매고 인공모임에 나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버티다 까무러치기 여러 번이었단다. 동네 도원석씨의 어머니와 소반부락 청년단장 김창렬씨의 증언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한 채 빚으로 남아있다. 얼마나 맞았는지 엎어져 치료(?)받는 어머니의 둔부가 자동차 타이어 같았다.

공교롭게도 우리 동네에는 인민군이 잠시 주둔했었다. 그들이 내 놓는 쌀로 밥을 해주고 얻어먹기도 했으니 적치 3개월과 수복된 전쟁의 밀물 썰물에 사이에, 사상이나 이념과 무관하던 사람들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후에 어머니의 입을 통해 누님들에게 전해들은 내용이 가슴에 남았다. 조사관이던 지서장이 막판에 어머니를 불러놓고, 당신의 남편과 자기는 잘 아는 사이지만 사상이 달라 이렇게 갈렸다. 특별히 돌려보내니 돌아가면 자식들과 살아가는 데만 힘쓰라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제치하 광주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하고, 쫓겨 흥남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한 애국지사였고, 해방 1년 후 귀환하여 사회재건에 노력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으신 분이다.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었지만 기회주의자나 친일 분자와는 차원이 다른 애국지사였기에 그들이 적대적이었을 것이다.

2011년 초가을, 나는 담산리에 살던 고모를 차에 태우고 박상화 씨를 만나러 갔다. 광천읍으로 이사 간 박상화 씨는 고모부의 동갑나기 장조카로, 아버지가 담서(산)리에서 후퇴하는 기관원의 시간차(버스)에서 끌려 내리는 걸 봤다고 고모에게 전해준 분이다. 내가 전쟁유족회와 관련하여 간절하게 과거사 증언을 요구하자, 다 듣고 난 그 분은 그런 기억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고모는 친 오빠가 자기 동네 꿀꿀이 산에서 학살당한 걸 알고도 50년을 함구했는데, 한 치 건넌 사돈이 입을 열겠는가. 험한 꼴을 무수히 겪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나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김동춘 교수와 통화 후 고향 사촌들에게, 곧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조사가 이루어질 테니 그 땐 꼭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사촌 옆집 김영국 씨가 아버지의 희생 사실을 진화위 조사원에게 신고하고, 사촌에게 연락한 문건까지 확인되었다. 그러나 사촌이 연락을 주지 않아 그 유족확인신청 시효도 지난 걸 홍성유족회를 통하여 확인하면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고모는 친오빠가 자기 마을에서 학살당했는데도 50년 동안 입을 다물었고, 사촌은 신신당부를 묵살하고 연락마저 주지 않아 보도연맹희생자유족 인정도 못 받게 했단 말인가. 지금은 세상이 변해 그런 걸 알려준다고 후환이 생기지도 않는 국가사업인데, 이게 무슨 업보란 말인가. 그 박상화 씨나 김영국 씨는 90을 전후로 작금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할 수 없어 고모를 앞세워 아버지가 끌려 내렸다는 곳을 찾아갔다. 광천읍 담산길 99번지. 이준배 씨가 살았다는 빈 집이 있고, 백 오십여 미터 논두렁 건너 앞산을 보니 그럴만한 지형이었다. 소문대로, 일제 때 금광굴이 많이 메워진 채 흉물스러운데 이 구덩이에 시신들을 던져 넣었단다. 그 왼쪽인 오서산 방향 꿀꿀이산자락 대나무밭 사이사이엔 버려진지 오래인 공동묘지가 어지럽다. 그 공동묘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삼태기 모양의 지형이 감춰진 듯 음습한데, 그곳에서 2차 학살의 불질을 한 뒤 대강 삽질하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지난 봄. 나는 ‘초능력’ 풍수가인 모종수 씨로부터 이곳에 유골들이 많이 묻혀있고, 아버지도 여기 함께 묻혔다는 걸 확인하고, 홍성 전쟁유족회에 알리면서 용봉산 추모제에 참석한 바가 있다. 유족회를 통하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 추가 유해발굴요청을 하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유해를 찾으면 유전자를 감식하여 공주 유룡리 위패장 묘소로 모실 생각이다.

1999년 에세이집 ‘평교사는 아름답다’에서 나는 어머니의 황혼 -「어머니의 백년세월」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의 모습에서 성자의 얼굴을 봅니다. 어머니의 표정에서 백치의 그것을 봅니다. 일백년 수난사의 증인인 어머니, 인생도 음식도 사랑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군요. 어머니, 왜 해는 떴다가 집니까?

이제 어머니 가신지 12년, 어머니 생각이 간절할 때마다 작은아들은, 이슬 털며 콩밭 매던 그 달밤 흰 수건 쓴 어머니의 손짓을 본다. 마흔 중반의 전쟁유족 미망인. 7남매를 부둥켜안고 입을 앙다물던, 고통과 고독과 차별과 위협과 멸시와 가난과 뭉뚱그려진 공포와 절망 앞에 손발이 험상궂던 어머니! 어머니, 고희가 된 아들의 이 사모곡이 들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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