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녹색당
칼럼·독자위원
이곳이 세계의 끝일까. 기후위기,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일자리 감소, 어떤 생물종과 인류의 멸종, 저출산, 고령화… 그리고 이 담론의 연장선에서 지역은 종말을 선고받았다. 몇몇 전문가들은 몇 해 안에 ‘정상화’ 궤도에 오르지 못할 때, 지역은 소멸할 것이라 경고한다.
‘지방소멸’에 관해 내가 들은 가장 인상적인 말은 농부인 친구에게서였다. 그는 이 이슈가 불편하다고 했다. 이곳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들이 지워지는 담론보다,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지역민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고 했다. 신문이나 뉴스에 ‘지방소멸’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다른 종말 키워드가 그랬듯 어딘가 현실감 없는 두려움이 일었을 뿐, 이 담론이 누군가를, 우리를, 나를 지운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즉각적으로 공감이 가는, 오래 마음에 남는 말이었다.
지역민의 경험과 현실, ‘서술’과 ‘증언’은 지방소멸을 비롯한 공적 담론을 주도하는 소위 ‘전문가’들, 정책입안자들이 다루기 어려워하는 주제다. 그들이 ‘성장주의’ 언어 체계에 갇혀있는 한, ‘성장지표’에 더하거나 뺄 수 없는, 통계 불가능한 영역은 지식과 과학 그리고 역사의 파생물로, 주변적이고 사소한 것들, 혹은 잡음으로 치부되고 만다.

그러니까 ‘언어’의 선택이 곧 윤리적인 문제의식이다. 인류학자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은 ‘주변을 서술’하는 것이 왜 ‘과학’이 아닌지 역설한다. 이 책은 학술서임에도 기존의 어법과 다른 길을 간다. 저자는 “거시사를 서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저자는 믿음 그대로 책을 썼다. 송이버섯과 그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글로벌 공급사슬과 그 기제를 파헤쳤다.
송이버섯은 주로 일본에서 귀한 ‘선물’로 소비되는 고가의 임산물이다. 더는 일본 현지에서 버섯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중국, 캐나다 등지에서 송이버섯은 백색황금으로 불리며 채취된다. 세계 각지의 숲 특히 미국 오리건주에서 채집인, 중개인, 무역인이 모여들며 송이버섯 글로벌 유통망이 형성된다.
이 유통망은 ‘성장과 진보의 기제’인 ‘자본주의’가 비자본적인 것들, ‘주변적’인 것들에 의존하는 특유의 의존성을 드러내고 있다. 인위적인 재배가 불가능한 공유지 산물인 송이버섯의 생태형, ‘규격화’된 노동 형태를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벗어난 채집인들, 그들이 속한 인종, 계급의 역사적 필터에 따라 ‘번역’되는 ‘자유’의 다양성,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자본주의의 부록이 아니라, 관념적인 ‘글로벌 경제’가 현실에 투입될 때 나타나는 복잡한 형상을 담아낸 것이다.
세계 각지 ‘주변의 역사’가 교차되는 현장들의 방대한 서술을 통해 저자가 도달하려는 곳은 다음과 같은 정의다. “자본주의는 번역 기계다.” 이 기계는 공유재를 ‘재고품’과 ‘상품’으로, 땅을 ‘산업단지’로, 지식을 ‘정보’로, 인간을 축적과 생산을 위한 ‘인구’, ‘노동력’, ‘출산율’로 번역한다.
“실로 남은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기획 바깥에 있던 것들이 오늘날 왜 살아남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저자가 자본주의의 주변을 주목하며 연구를 이어가는 이유는 ‘미개발’된 벽지(오지)에 한정된 특수함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나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 ‘주변적’ 생존 방식에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소멸위기대응기금’이 각종 ‘발전’을 위한 산업에 투자되고 있다. 우수사례지로 꼽히는 충남 부여의 스마트팜복합단지나 강원 삼척의 수소특화산업단지는 ‘성장주의’라는 번역 기계 속에서 닫힌 이야기만을 반복할 때, 다른 삶의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다른 가치를 중심에 둔 지역 회생을 논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다른 번역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에서 소멸의 조짐을 읽을 수도 있지만, 다른 생존방식에 대한 ‘주변 읽기’도 가능하다.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가 이 책의 서평에서 지적했듯, ‘세계 끝’에 있는 것은 버섯이 아니라, 개발 프로젝트의 시간이다. 정말로 소멸하고 있는 것은 ‘지역’이 아니라, 지역에 대한 ‘담론’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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