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의료복지사협 이사, 칼럼·독자위원
1978년,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 세계 137개국 정부 대표단과 국제기구 관계자 3000여 명이 모여 하나의 선언을 채택했다. 건강권은 인권에 속한다는 합의와 지역사회 중심의 1차 의료를 확대한다는 결의였다. 역사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세계화에 휩쓸려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계적으로 건강 불평등은 커졌고, 의료서비스는 첨단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소수를 위한 상품이 됐다.
10년 전, 홍성으로 이사를 왔다. 그해는 홍성우리마을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현 홍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하 홍성의료사협)이 창립한 해이기도 하다. 조합원 315명이 출자금 4000만 원을 모아 시작했고, 현재는 조합원 691명, 출자금 1억 4000만 원으로 성장했다.
홍성의료사협 조합원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돌봄을 만들고자 했다. 마을 주치의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지역이었다. 전국적인 협동조합 운동과 인간적인 의료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에 많은 의료사협이 생겼다. 홍성의료사협은 최초 의료사협은 아니지만, 전국 의료사협 연합회 소속 30개 조합 중 면(面) 단위에 의료기관을 둔 최초이자, 유일한 조직이다.
물론 운영이 쉽지는 않다. 시장이 애초 지역의료에 접근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이는 알마아타 선언이 의미하듯 지역 돌봄과 의료는 공공에서 맡아야 할 영역이었다(2024년 기준 우리나라 보건소의 공중보건의 배치율은 85%, 보건지소는 40%.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 비중이 OECD국가 평균 57%이고 우리나라는 5.2%). 소설가 존 버거는 《행운아》에 영국 농촌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무명의 의사를 관찰한 에세이를 썼다. 존 버거는 현대인이 파편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에 고독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마을과 함께 살아가던 그 의사를 환자이자 이웃을, 온전한 인간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기에 ‘행운아’라 칭했다.
홍성의료사협은 지역민의 신뢰를 얻었다. 창립한 지 10년이 됐지만 홍성의료사협의 과제는 계속 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과제일 것이다. 인구 3000명이 거주하는 면에 의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이상에 가까운 일이다. 직원들의 헌신과 조합원들의 참여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곳에서만 가능한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짓는 이 작은 면에 의료사협이 생긴 데에는 지역의 다양한 협동조합 운동기반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오랜 기간 유기농 운동이 있었다. 그 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녹색평론》 2025년 겨울호에 <갈등과 고립의 시대, 협동운동을 생각하다>라는 글이 실렸다. 협동조합 운동의 고장 원주시에서 무위당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황도근 교장의 글이다. 무위당 학교는 원주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한 장일순 선생의 정신을 잇고 전파하는 학교다. 황도근 교장은 고립의 시대에 “협동은 관계를 회복하는 일,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힘”이라고 말한다. 고립의 시대일수록 협동이 필요하다는 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물론 협동에는 갈등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글쓴이의 말처럼 갈등을 어떻게 잘 넘기느냐가 중요하다.
반세기 전 외친 인류의 선언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언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지금 시대에도, 오히려 더 강하게 요구된다. 의료와 돌봄은 시장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린 충분히 알게 되었다. 고독사와 분열이 더 심각해지는 때에 우리에겐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서로를 돌볼 때 인간은 비로소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로를 행운아로 만들어가는 과정. 이것이 홍성의료사협이 지난 10년간 얻은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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