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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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매들
  • 전만성(화가, 갈산고 교사)
  • 승인 2009.12.0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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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12


얼마 전 경주에 갈 일이 있어서 천안에서 기차를 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보니 통로 건너편에 여자분 넷이서 마주보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모녀사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들이 자매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많게는 20년 정도 차이가 날 것 같은데 네 사람은 어린아이들처럼 장난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큰 소리를 내거나 주위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 언니답게 너그럽고 동생은 동생답게 장난스러운 게 오히려 그들을 조화롭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들이 모여서 가는 데가 어디일까? 부모님 제사? 조카 결혼식? 그런 생각을 할 때에 그 중 막내가 짐 속에서 뭔가를 꺼내 언니들에게 내밀었다. 떡이었다. 지난 추석에 만든 송편을 쪄 온 거였다. "떡은 김치와 같이 먹어야 맛이 나." 그 때 둘째 언니가 비닐봉지에 싼 김치를 풀었다. "이 참에 아주 점심을 먹어 두는 게 어떨까?" 큰언니가 약밥이라는 것을 꺼내 놓는 것 같았다. 그들이 웃음을 섞어가며 맛있게 먹는 동안 내 입안에도 침이 고였다. 그들의 점심식사는 소박하고도 풍성하며 즐거워 보였다. 식사가 끝날 즈음 막내가 커다란 플라스틱 맥주병을 꺼내들었다. 물이었다. '받으시오' 구성지게 권주가를 부르며 술 따르는 시늉을 했다. 

동대구역에서였다. 기차가 쉬는 사이 막내가 다리를 좀 펴겠다고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혼잡한 틈이었다. 언니들이 막내의 이탈을 불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사람들이 오고 가고 통로는 혼잡한데 문이 스르르 닫히더니 기차가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그 때 그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어! 영애 안 들어 왔어! 영애야!" 둘째 언니가 다급한 소리를 쏟아내며 유리창을 두드렸다. 기차가 철거덕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큰언니가 엉거주춤 유리창에 매달려 "영애야! 영애야!" 부르짖었다. 셋째가 출입구와 언니들 쪽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며 발을 굴렀다. 그 때서 생각난 듯 둘째가 셋째에게 "핸드폰! 핸드폰" 하고 외쳤다. "다음 차로 오라고 해" 큰 언니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번호를 누르는 셋째에게 말했다. 이미 함께 가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애니? 못 탔지? 다음 차" 말을 하다 말고 셋째가 멈춰 섰다. 그 때 막내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가며 나타났다. "짠! 나 여기 있지!"
 
나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태연했고 그들의 놀이는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기차는 달렸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경주에서 내렸다. 그들의 웃음과 놀이가 나를 따라 내렸는지 자꾸 웃음이 났다. 자로 잰 듯이 오차 없이 매끄럽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요즘, 오랫만에 구수한 사람냄새를 맡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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