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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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환(幻)
  • 전망성(화가, 홍성고 교사)
  • 승인 2010.04.2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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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올 봄 날씨는 유난했다. 심술궂은 사람의 심사처럼 종잡을 수 없이 하루가 다르게 변덕을 부렸다. 문을 열면 봄이 와 있을 것 같은데, 어서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데 밖엔 눈이 쌓여 있곤 했다. 시골생활이 좋다고 멀찍이 이사를 한 친지는 봄눈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다고 울상이었다. 신문과 TV에서는 연일 폭설로 고립된 차량들과 산간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다가 도로 한겨울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기분 나쁜 것은 서북쪽에서 날아와 하늘을 덮는 황사였다. 그 찐득한 것은 물로도 닦여 나갈 것 같지 않은 고약스런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어디 사람뿐이랴. 건물이며 수목이며 여린 풀잎에까지 더께로 내려앉아 종국에는 이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공포감을 갖게 했다. 말로만 듣던 노란 하늘이 뿌연 창밖으로 펼쳐졌다. 사람들마다 하얀 마스크로 입을 봉쇄한 채 걸어 다니는 행렬이 무슨 영화 속 같이 음울했다.

황사가 날아오는 것은 지구가 사막화하기 때문이라고, 마스크를 써서 호흡기를 보호해야 한다고 아나운서는 말을 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와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듯한 공기가 만나 충돌하기 때문에 3월에 비가 아닌 눈이 내린다고도 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들을 왜 할까? 9시 종합뉴스가 김빠진 사이다처럼 싱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발령을 받은 곳은 동해시 묵호였다. 우선 발령을 받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내 고향 반대편 동해바닷가에 발령을 받고 보니 춥고 외로웠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온몸으로 한기를 느끼며 움츠렸다. 외로움은 전적으로 나만의 문제일 것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별 것도 아닌데 나는 몸서리를 쳤다. 봄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봄은 냉큼 와 주지 않았다. 내 고향에는 와 있을 것만 같은데 동해바닷가 묵호항에는 모래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3월 하순이었다.

3월에 내린 눈으로 봄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꺽은 어느 날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낭자한 장구소리를 듣게 되었다. 학교 뒷산 수원지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했다. 일본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수원지에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있는데 봄에는 꽃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거였다.

장구소리가 들려 온 것은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그 며칠은 날씨도 화창했다. 장구소리가 사라지면서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고 간간히 꽃잎이 바람을 타고 복도에 까지 날아왔다. 운동장에서는 꽃잎위에 내 발자국을 찍을 수도 있었다. 눈 위에 발자국이 찍히듯 지나가는 걸음마다 꽃잎위에 내 발자국이 새겨졌다. 내 발밑에서 으깨지는 아직 고운 꽃잎들이 가련했다. 어디 꽃잎뿐이겠는가? 봄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허망하고도 가여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운동장위에 내 발자국을 찍었다.

"벚꽃은 두 번 보는 거라네. 한 번은 나무위에 달린 꽃을, 또 한 번은 땅위에 내려앉은 꽃을 말이야." 고향이 부여인 선배 한 분이, 백마강의 유장한 흐름을 떠올리게 하던 선배 한 분이 유별나게 봄을 타는 나에게 해 주신 말씀이 이 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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