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간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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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간의 여행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09.2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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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의에서 “당신의 인생이 삼일밖에 남지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받았다. 이것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와 같은 것으로 ‘사변적 논의’나 ‘관념적 생각’으로서는 풀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단순하게 이 물음은 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함을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새기자는 의도에서 던진 것이 아닐까하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 본다.

삼일간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머니께 여쭈어 보기로 했다. 팔순의 어머니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원에 가서 더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겠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야 말로 우문현답이었다. 전부라고는 장담 할 수 없지만 영생의 천국이 있다고 설교하던 목사·신부님도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고, 생사(生死)가 따로 없음을 가르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이며,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겠다던 산속의 도인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의지하니 말이다.

‘천국’ ‘불생불멸’ ‘불로장생’ 모두 진의(眞意)와 방법은 어찌되었든 ‘영원한 삶’이라는 데는 일치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의 삶을 어떻게 살든지 간에 영원한 삶을 찾기 위한 몸부림 일 것이다. 어머니처럼 병원 즉, 현실에서 삶을 더 연장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못다 한 삶을 정리하는 것도, 그리고 그동안 마음에만 두고 직접 해보지 못했던 것을 실천해 보는 것에서부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노력까지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다음 생을 준비하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생사에 있어서 무상(無常)·무아(無我)·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佛子)이다. 그래서 삼일 전부를 이것을 깨닫는데 투자하려고 한다. 깨달음에 이르는데 있어서 가장 지름길이라는 선(禪)은 문자에 매달리지 않고[不立文字:관념과 사변적사고], 닦고 깨닫는 것[證得]을 빌리지 않음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하지만 말과 글이 아니면 설명을 할 수 없으니 아는 대로 설명해 본다.

어릴 적에 마당에서 개를 키웠다. 녀석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되는 것은 동생이 요즘의 장판처럼 깔아놓은 대나무를 쪼개서 엮은 방바닥에 응가를 했을 때이다. “워리~ 워리~”하고 부르면 쏜살같이 들어와 응가를 맛있게 먹는 것도 모자라서 가끔씩 더럽다고 토악질 하는 나의 토까지 먹어치운다. 이처럼 나(사람)에게는 더러운 것이지만 개에게는 맛있는 음식이다. 생사 역시 인간의 관념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붓다는 무상·무아로 생사를 설명한다. 우유를 발효시키면 요구르트로, 치즈로, 혹은 버터로 변한다. 이때 ‘우유성(milkness)’이라는 본질이 상속되듯이 우리가 말하는 생사는 단멸적 관념 일뿐, 정확히 말하면 계속해서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최초와 마지막이 산정 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것(우유)을 기준으로 할 때(↔소↔우유↔요구르트↔) 전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여러 가지 조건들에 의해서 원인과 결과가 반복되어 갈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생사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앞서 말했듯이 관념이 만들어 낸 것이다. 붓다가 말하는 관념은 철학에서 말하는 선천적(a priori)으로 인식하는 능력 즉, 순수이성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순수이성이라는 것 역시 철학자가 산정한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선천적으로 어떤 사람은 뱀을 무서워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변화(생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경험해서 영속적으로 이어져오는 선천적 인식의 결과이다.

붓다는 이 같은 것을 분별력이라고 하고, 깨달음은 그 마음(순수이성)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당신의 인생이 삼일밖에 남지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본래부터 이것이라고 콕 집어서 말 할 수 없는 ‘삼일이라는 시간과 인생을 가립(假立)’하여 또 한바탕 관념 속에나 존재하는 허망한 삶을 찾아 나서도록 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돌이킬 수 없고, 현재는 지나가고 있으니 잡을 수 없으며,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오직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순간뿐이다. 현재 마음을 바꾸니 과거의 미움도 원망도 사라지고, 미움과 원망이 사라지니 행복의 미래는 당연히 도래 할게 아닌가? 마치 소가 소를 낳고, 돼지가 돼지를 낳듯이... 그래서 웃음과 사랑과 화합이 반드시 행복을 낳는다는 확신으로 삼일간의 여행을 마치며, 불생불멸, 본래의 자리로 한 발짝 다가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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