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부
칼럼·독자위원
땅을 딛으며 거리를 걸어도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 연민이란 땅 밑을 상상하는 것. 지금 밟고 있는 땅 밑에 무엇이 묻혀있을지 생각하면 한없이 막막하다. 수많은 시체와 피와 땀과 눈물로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지층들.
발을 하얀 양말로 감싸고 하얀 신발로 덮은 채 그 위에 가만히 서 있다. 바닥 밑창은 딱딱한 아스팔트나 콘크리트에 닿아 있고 깔끔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없이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 거기에도 또 위층이 있고 비행기가 날고 지구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오르는 우주선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 공적인 담론장에서 말해지는 언어들은 이 첨예한 탑 위에서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껍데기 위에 또 껍데기를 더하는 그런 짓.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맹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 껍데기는 충분히 세련되고 자기 안에서 완벽하니까. ‘그러니까 논리적이고 인과관계가 정확하지만, 손에 잡히는 현실이나 삶의 경험과는 거의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학은 가상의 세계 위에서의 놀음이다. 경계가 명확하도록 약속한 개념이 있고 그 개념들을 차곡차곡 쌓아 복잡한 계산을 해낸다. 그러나 현실에 1은 없다. 자로 길이를 잴 때 1cm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1이 아니다. 원주율의 소수점 아래 행렬과 같이, 정수로 환원되지 못하는 지저분한 나머지가 있다. 수학은 그러한 것들을 잘라내고 깔끔한 1과 깔끔한 1이 만나 2가 된다고 말한다.

미디어에서 사용되는 언어도 이와 같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업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하지만,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흙 위에 콘크리트가 쌓이고 쌓여 한없이 높아진 고층빌딩의 높이만큼, 우리의 생활과 언어는 분리되어 있다. 부유감이다. 내가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진지하게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비웃음을 산다.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눈앞에 닥친 다음 차례의 습득뿐이다. 다음 거래, 다음 융자,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다음 구매.’
‘역사에 대한 어떤 감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감각은 완전히 말살됐거나 있더라도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하늘에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면 거기엔 수만 개의 삶이 있고, 같은 수만큼의 고독이 있다. 그들을 잇는 것은 추상적인 SNS와 배달 오토바이 소리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알맹이다. 그 알맹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 글을 쓰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동력. 말하기 전 들이마시는 숨의 미약한 떨림 같은 것. ‘텍스트가 써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된 그 동작.’ 가사를 몰라도 노래하는 가수의 몸짓과 표정과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무엇. 청중의 박수와 호응에, 그 영향력으로 더 진해지는 공연자의 손짓.
본능이든, 자연이든, 사랑이든, 자유든, 희망이든, 꿈이든, 몸이든 뭐라 이름 붙여도 상관이 없다. 애초에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알맹이가 우리에게 먼저 있다는 믿음.
그 알맹이를 인지할 때 진짜 패배가 가능하다. 자유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구촌을 움직이는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부터 이미 패배한 것이다.
존 버거는 찰리 채플린을 떠올린다. ‘광대는 지게 마련이었다. 패배는 그가 하는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다. 채플린의 익살이 지닌 에너지는 반복적이고 점점 커진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인 어떤 사람.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복수성(複數性)이다.’
부유하듯이 살지 않고 진짜 패배했다고 몸으로 느끼고 난 다음에야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껍데기에 껍데기를 더하며 사는 동안에는 승리도 패배도 아무것도 없다. AI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한 부속일 뿐.
구체적인 것이 필요하다. 몸에 흔적이 새겨질 정도로 진하고 구체적인 경험. 곧, 알맹이의 회복. 그러나 얼굴 맞대지 않고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 존 버거의 이런 말이야말로 지나치게 낭만적인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다시 그러나, 우리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언제나 분명한 진실이다. 땅에 발붙이는 구체적인 것은 타자와 부대끼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좋은 말’로 허공을 딛고 있는 발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리는 것이,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제나 움직이는 것 안에 있으니까. 인간의 의도와 계획 이전에 그것이 먼저 있으니까.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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