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100주년의 의미와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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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100주년의 의미와 가치
  • 홍주일보
  • 승인 2020.10.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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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20년)는 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다. 홍성군은 오는 25일 갈산의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지에서 청산리대첩 100주년 추모제를 연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이후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알고 추모하는 일이야말로 장군의 애국정신과 호연지기를 되새겨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함께 여는 일이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21일의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전투 등 6일간에 걸친 일련의 전투를 통틀어 일컫는다. 1920년 서간도와 북간도지역을 침입한 일제의 대규모 병력에 맞서 독립군 연합부대는 3개 연대로 전열을 재정비했다. 홍범도는 제1연대장으로 대한독립군과 국민회, 의군단, 한민회, 의민단, 신민단, 광복단 소속의 연합 부대를 지휘하고, 김좌진은 제2연대장으로 북로군정서를 지휘했으며, 최진동은 군무 도독부의 지휘를 맡았다. 10월 21일 아침 김좌진의 부대가 백운평 계곡에서 적의 선발대 200여 명을 물리쳤으며, 같은 날 오후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가 완루구에서 추격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400여명을 사살했다. 10월 22일에는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가 연합해 어랑촌 계곡에서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맞아 승리했다. 아침 9시부터 시작돼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크게 패해 기병 연대장을 비롯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 적이 입은 피해는 조금씩 다르나 약 1000여명 가량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 등지에서 연이어 일본군을 격파했고, 전투는 10월 26일 일본군의 퇴각으로 끝이 났다.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했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명을 낸 것으로 기록된 승전이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은 홍성사람이다. 일찍이 사재를 털어 민족사상과 독립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문화계몽운동과 근대교육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을 배출한 지역의 후손으로 마땅히 민족의 정기와 호국의지를 높이는 일에 자랑스럽게 앞장서야 한다. 우리고장을 애국·애족의 대표지역으로 그 의미와 가치를 전국에 알리는 일에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아 모두가 솔선수범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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