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신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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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신미대사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10.1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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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볼라벤이 “자신이 탄 가마가 가지가 걸릴 것을 우려하는 임금의 걱정소리를 듣고 스스로 들어 올렸다”는 속리산 정이품소나무에 치명적 상처를 입혔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세조가 무슨 일로 법주사에 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세종과 세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호불(護佛)군주에 속한다. 세종은 초기에 불교를 선·교 양종으로 축소·통폐합 하는 등 배격했지만 후일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최초로 불경을 번역한데서 보듯이 불교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었다. 그리고 세조는 이례적으로 궁궐을 비워두고 먼 거리에 있는 법주사를 직접 찾아갔다.

세조는 세종·문종·단종을 이어 왕이 되었지만, 세종의 아들이다. <세종실록>에는 법주사와 말사인 복천암(신미대사의 주석 처) 불사를 했다고 적고 있으며, <성종실록>은 유생들이 주지의 외람을 들어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불가(不可)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왕실과 이 두 부자가 유독 법주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이 단순한 신변 내지 왕위찬탈 등의 개인적 이유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근 들어 여기에 대한 분명한 해답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 중하나가 세종대왕이 죽기 직전 침실로 불러 윗사람의 예로 대했던 신미대사에게 내린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이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국이세(祐國利世)’ 즉,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대목이다.

이것은 끝임 없이 제기돼왔던 한글의 범자(梵字; 불경을 기록한 고대 인도문자) 기원설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일반적으로 한글창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학자들이 중심으로 비밀리 진행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한글창제에 가장 크게 반발했던 집단이 바로 집현전학자들과의 실무책임자인 최만리였으며, 억불숭유라는 국가정체성과 달리 많은 불경과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 불교관련 문헌들이 훈민정음 반포와 동시에 창작되거나 번역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번역했고 그 중심에 신미대사가 있었으며, ‘나랏말쌈이……’로 시작되는 어지(御旨)의 글자 수가 ‘불교의 신성수(數)’, 한글108자, 한문은 절반인 54자로 되어 있는 등 수 많은 근거와 정황들이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신미대사 한글창제설을 주장하는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반포 8년 전 이미 신미대사가 한글로 저술했다는 책과, 반포 당시 세종대왕과 집현전학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를 근거로 그간의 여러 이견들을 정리하였다.

우리 홍성 역시 이때까지의 일반적 견해에서 홍성출신의 성삼문 선생이 집현전학자로서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최근자료와 연구에 의하면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하여 금번 한글날을 계기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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