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자 없는 시신 83구 홍주성 밖에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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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자 없는 시신 83구 홍주성 밖에 매장”
  • 한기원 기자
  • 승인 2024.07.2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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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의병의 무덤? 동학농민군의 무덤? 〈2〉

홍주 지역 유림은 충남 서북부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홍주성을 점령하려 하자 각 유회소를 통해 의군을 모집하는 한편 보부상과 연결해 민보군을 조직했다. 홍주의 민보군은 홍주목사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과 협력해 동학농민군의 홍주성 공격을 막았으며, 이후 동학농민군 색출에도 앞장섰다. 

이처럼 동학과 유림은 적대적이었다.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수백 명이 사로잡혀 있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들을 처형할 것을 이승우 홍주목사에게 시달했으며, 홍주목사는 홍주성 북문 밖 월계천(月溪川) 변에서 동학농민군을 효수했다. 

이와 관련해 ‘홍양사(洪陽史)’를 저술한 향토사가 손재학(孫在學)은 생전 증언을 통해 “사로잡힌 동학농민군들은 홍주성 밖에 서서 처형했어요. 모두가 목이 잘리는 효수형으로 말입니다. 문루에서부터 건너편 산까지 줄을 빨래줄처럼 늘이고 동학군의 상투머리를 모두 매달았습니다. 기리고는 목을 친 다음 목사가 직접 줄을 흔들어 목이 잘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기록은 손재학의 손자인 손규성이 ‘하늘의 북을 친 사람들-홍성에서도 동학기(東學旗) 꺾이다’에서 생전 조부(祖父)의 증언을 쓰고 있다.

1949년 유골이 발견된 대교리 동록(東麓;동쪽 기슭)은 동학농민군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홍주성 동문 밖 홍성천과 동학농민군의 처형장이었던 북문 밖 월계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와 1905년의 의병 전쟁 당시의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인원수와 희생자 수, 희생자 처리지역과 방법 등의 밀접한 관계를 들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경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홍주성 전투와 관련한 ‘주한일본군공사관기록’과 ‘동학사’ 또는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등의 기록을, 의병의 경우에는 1905년의 의병전쟁 당시의 홍주성 전투와 관련한 ‘의사 이용규전’이나 ‘독립운동사자료집’ 또는 ‘민종식 판결선고서’와 ‘조선폭도토벌일지’ 유준근의 ‘마도일기’와 홍건의 ‘홍양기사’를 비롯한 ‘대한매일신보’ 등의 기록을 참조해 살펴본 결과, 홍주성 전투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최소 7000명이며, 많을 때는 수만 명에서 6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의병의 경우에는 최소 200명에서 최대 5000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으로 본다면 동학농민군의 전투 참가자가 의병의 전투 참가자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동학농민군의 경우 희생자가 최소 200여 명에서 600~700명, 수백여 명에서 수천여 명, 많게는 3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포로로 잡혀 처형되지 않은 수백여 명과 부상자까지 포함한다면 동학농민군의 사망자는 더 늘어난다.

의병의 경우, 대체적으로 80~100여 명, 300여 명에서 1000여 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중 일본 측 기록은 82명,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의병이 남긴 자서전에는 300명 또는 100여 명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보도된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1000여 명으로 기록했다.

주목할 기록은 당시 선유사(宣諭使;예전에 나라에 병란이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을 훈유하는 임시 벼슬이나 그런 벼슬아치)로 파견된 윤시영은 이들의 시신을 성 밖으로 옮겨 한곳에 매장하도록 했다 ‘윤 4월 17일 일찍 민부(民夫)를 내어 죽은 사람을 옮겨 묻으니 어제 묻은 자와 합해 83명이다. 당일에도 목 잘린 자 15명을 찾았는데 혹시 결성(結城), 서산(瑞山)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윤시영은 의병의 시신을 매장하기에 앞서 윤 4월 14일(양 6월 5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방(榜)을 붙여 “이번 성 함락 때 죽은 사람을 오는 17일 다른 곳으로 옮겨 묻고자 하니 시친자(屍親者;죽임을 당한 사람의 친척)가 있으면 그날 이른 아침에 성 아래에 기다렸다가 시체를 찾아가라”고 했다. 

유림의 주도로 전개된 홍주 의병은 사후 선유사로 파견된 윤시영 홍주군수의 선처에 의해 홍주 지역에 연고자가 있는 대부분의 시신은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연고자가 없어 찾아가지 못한 시신 83구만 성 밖 어느 한 곳에 매장됐다. 이때 의병들이 매장된 곳을 홍주의사총의 유골이 발견된 대교리 간동이냐 하는 것은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 당시 유림의 세력이 강했던 홍주 지역에서 선유사로 파견된 홍주군수 윤시영이 83명의 시신을 매장했다면, 홍주 지역의 정서상 정성스럽게 매장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홍성천 주변에 내버려 두거나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윤시영 홍주군수가 ‘매장’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홍주의사총이 의병의 무덤이냐? 동학농민군의 무덤이냐?”의 논쟁의 핵심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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