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분자보다 부역자(附逆者)가 우대받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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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분자보다 부역자(附逆者)가 우대받는 세상
  • 이상권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6.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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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생존했으면 100세가 넘은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홍성경찰서 말단 순경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 선로를 유지·보수하는 노무원으로 휴전선 이북인 강원도 복계역에서 근무하다가 정부 수립 직후에 시행된 순경공채에 합격한 ‘건국경찰’이라는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6·25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홍성에 들어올 즈음에 어머니는 여섯 살짜리 해방둥이 형은 걸리고, 세 살짜리 누나를 업은 채 피난길에 나섰다. 중도에 신작로에서 인민군 대열을 만났는데, 철없는 형님이 자랑스럽게도 “울 아부지두 총 있는디”하는 순간 모친은 현기증으로 쓰러질 듯한 가운데서도 “바깥 양반이 포수구먼유”라고 둘러대어 목숨을 부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통에 세 살 누이는 기아와 질병으로 말미암아 살아남지 못했단다. 전쟁은 이렇듯 총으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전쟁 발발 3개월 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 패잔병들과 자발적 좌익 부역자들은 지리산, 덕유산은 물론이고 충남 논산의 대둔산에도 2만여 명이나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국군이 전적으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투입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많은 경찰관들이 공비소탕과 인근 주민 보호 작전에 투입됐다.

대둔산 공비는 휴전 후 1956년 1월까지도 게릴라전을 펼쳤다고 하는데, 그 무렵 어느 때인가 홍성경찰서에서 대둔산으로 떠났던 경찰병력 중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두 분만 살아 돌아온 이후로 더 이상 공비토벌에 차출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인민군이 점령한 시기, 소위 인공시절에 “○○○네 집 애비가 △△△네 아버지를 못된 부자라고 인민위원회에 고자질해서, 그날 밤 인민재판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죽창에 찔려 죽었다”거나, 그 비슷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부역자네 집 애들하고는 같이 놀아도 안 되고,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어린 뇌리에 고착됐다. 결국은 세월이 흘러 그런 애들과 친구가 됐지만….

부역자란 역적질을 하거나 역적질에 동조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니 6·25전쟁과 관련해 부역자란 북한의 침략에 동조해 대한민국을 패망시키기 위한 행위를 하거나 도운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6·25 부역자는 인민군과 동일시돼야 하는가? 결론은 “그렇다”이다. 공식적 신분만 민간인이었을 뿐, 실상은 적군이었던 것이다.

이런 부역자들을 불법으로 처형한 시기는 전국적으로 1950년 10월부터 11월 사이, 9·28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 패잔병과 부역자들이 대거 한강 이남에 갇혀있을 때인 두 달 동안이었다. 그 직전인 7월부터 9월까지는 자본가, 부자 또는 공무원 출신 등 소위 반동분자들이 인민군이나 부역자들로부터 그렇게 당했었다. 부역자들에 의해 처형된 반동분자의 가족들이 주축이 돼 치안대를 조직하고, 경찰의 묵인하에 부역자들을 색출해 처형함으로써 복수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록 부역자라고 하더라도, 포로로 잡힌 군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것은 불법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공권력 또는 공권력의 묵인하에 그렇게 처형된 부역자에 대해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조 제1항 제3호는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 사망·상해·실종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하고 진상규명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이 시행되자 부역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진상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고, 홍성에서도 630명 이상의 민간인이 부역자로 몰려서 불법으로 처형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진실·화해법에 따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 가족은 부역자가 아닌데 부역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라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억울하게 당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불과 1~2개월 전에 부역자들이 반동분자를 색출해서 처형했다. 그래서 처형당한 사람의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로 이뤄진 치안대가 부역자를 색출해서 복수했다.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한 시점에서, 치안대원들이 멀쩡한 사람을 부역자로 착오해서 처형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한편, 전쟁기간 중 인민군과 부역자들에 의해 학살된 소위 반동분자에 대해선 대한민국 정부가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그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논리이다. 실정이 그러하니, 처형당한 반동분자의 유족들이 인민군이나 부역자들에게 학살당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통상 1억 5000만 원에 달하는 보상금이 욕심나서 국군이나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신고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한다.

국가가 소위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불법 처형된 사람들에 대해 국가유공자 대우는 해줄 수 없다손 치자. 그렇더라도, 안보를 소홀히 해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을 북한으로만 돌리고 아예 외면해도 되는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윤석열 정부와 국회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민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이상권 <변호사·전 국회의원·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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