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동(시)의 미학은 해방의 미학이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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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동(시)의 미학은 해방의 미학이어야만 하는가
  • 정세훈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11.18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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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노동문예전사 정인화의 〈깡다구 동지들아 전진이다〉

밀리고 밀려온 우리들/천길 낭떠러지 굽어보며/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섰어/뜨거운 입김 나누며/뛰는 가슴 껴안고/절벽 끝에 버티고 섰어/피 토하고 쓰러진다 해도/이젠 물러설 수 없어//동지들의 원혼들이/일어나라, 일어나라/저리도 외치는데/죽은 자가 살아와/ 동지들이 살아와/ 나아가라 나아가라/저리도 호령하는데/이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땀에 절은 작업복 대신/푸른 수의 입은 동지들이/푸른 옷깃 휘날리며/저렇게, 저렇게 앞서 달리는데/동지들아, 동지들아!/공장뺑이 동지들아!/저기도 절벽이다!!//사 용 주 가 배 짱 이 면 노 동 자 는 깡 다 구 다 !/재벌그룹 비호하는 군부독재 물러가라!//동지들아 동지들아/깡다구 동지들아-/우리들은 차돌/우리들은 강철/투쟁이다!/투쟁이다!

소개한 시는 노동현장 최전방 노동문예전사 정인화 시인이 1989년 9월 도서출판 세계에서 ‘세계시선’ 4번째로 출간한 시집 <깡다구 동지들아 전진이다> 말미에 수록한 표제 시 전문이다. 시인은 전태일기념사업회가 1988년 3월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횃불을 높이 든 전태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 이듬해인 1989년 1월 20일 종로성당에서 시행한 제1회 전태일문학상 시상식에서 연작시 ‘불매가’ 로 최우수상을 받은 장본인이다. ‘제1회 전태일문학상 최우수 당선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집의 표제 시는 ‘불매가’의 마지막 28번째 시다.

이 시집에는 여타의 시집과는 달리 해설 또는 발문이 없다. 대신 시인 자신이 직접 쓴,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다 당국에 구속된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론이 담겨 있다. 시인은 이 글에서 “김 동지! 왜 우리의 미학이 싸움의 미학이며, 단죄의 미학이며, 나아가 해방의 미학이어야만 하는가를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 싶은데, 어떻습니까? 물론, 동의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며 노동, 노동자, 노동시, 노동시인의 미학은 ‘싸움’ ‘단죄’ ‘해방’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심사위원 김병걸 시인은 ‘구체적 현장성과 운동의 실천성’이란 제목의 심사평에서 연작시 ‘불매가’에 대해 “서사시적 요소가 깃들여진 총 28편의 연작시로서, 지난 1987년 울산의 현대조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일어난 ‘7·8월 노동자대투쟁’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1편에서 28편까지의 짜임새 있는 구성이며, 예심을 통과한 다른 작품들이 대체로 구체적 현장묘사가 결여된 채 노동해방의 당위성에만 치우쳐 있는 반면에 이 작품은 비교적 ‘노동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주제가 노동현장의 구체적 묘사와 함께 잘 조화되어 있다. 선명한 주제, 구체적 현장성, 짜임새 있는 구성 등이 뛰어나다.”고 평했다.

“아, 고개 조아리며 숨 죽여 살아왔네/목구멍 풀칠 무서워/밤이면 밤마다 새순처럼 돋아나는 분노/비겁하게 꺾어가며 흐느끼며 살아왔네//코쟁이 나라에서 주문한 배 만들다/족장에서 떨어져 죽은 절단조장의 죽음을 보고/나만은 원숭이처럼 조심스레 족장타며/죽은 놈만 서럽다고 비웃고는/흩어진 밥부스러기 줏어 먹기에 바빴네/아, 내리치는 피묻은 채찍 앞에/꿇어앉아 두 손 비비며 치사하고 더럽게 살아왔네/그까짓 목구멍 풀칠걱정/바닥 기어다니는 똥개처럼 살아왔네” 연작시 ‘불매가’ 26번째 ‘아, 참으로 욕되게 살아왔네’ 전반부다.

시인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등에서 현장 노동자로 일했다. 소개한 시집 외에 <우리들의 밥그릇(1989, 동광)>, <강이 되어 간다(1990, 노동문학사)>, <나팔수에게(1992, 노동자의벗)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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