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무명 화가 시절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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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무명 화가 시절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5.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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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대나무 작품 <풍죽>으로 첫 입선을 한 이응노는 더욱 맹렬하게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스승 해강 김규진의 고된 집안일과 문하생으로서 그림 수련을 동시에 해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고암의 부지런함과 꿈을 향한 의지로 1여 년 정도를 버텨냈다. 그러나 고된 집안일로 인해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했고 창작활동에만 오롯이 전념하기 위해 스승의 문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선전에서 초입선한 경력뿐인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없었다. 떠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필요한 그림을 그려주거나, 해강 선생을 따라 경상도 여행길에 동행하기도 했고, 전염병에 걸려 고향 홍성에 내려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간 그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우선 궁여지책으로 표구사에 취직을 해 기술을 배우며 일을 시작했다. 조금 지나지 않아 간판집에 취직을 해 간판 글씨를 쓰고,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됐다. 선생은 이때 처음으로 서양식 음영법을 활용해 입체감이 돋보이는 제작방식을 접했다고 하며, 표구 기술을 배운 덕분에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표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간판그림이라는 궁여지책이 이제는 본업이 됐고, 서울, 수원, 온양, 대전을 거쳐 1926년경 전주에 내려와 ‘개척사’ 간판집을 운영하게 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업가로서의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직원 30~40여 명을 둘 정도로 번성하게 됐다. 고 박귀희(朴貴嬉1909~2001) 여사와도 이즈음 혼인을 했고, 큰형의 둘째 아들 문세를 양자로 입적해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려 서울에 계신 해강 스승께 보내 평가를 받았고, 전주지역의 문인화사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러나 화가로서 이름을 얻기까지, 모든 예술가들의 숙명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무명 화가의 시절이 이응노에게도 다가왔다. 이 시기의 <묵죽도> 작품에서는 공간의 삼분할 방식과 하단의 적은 수의 줄기와 잎, 중앙의 초묵을 사용해 중봉으로 쳐낸, 바람에 날리는 듯 세찬 대나무 잎, 상단의 담묵을 사용해 뒤로 멀어지는 듯 원근감을 주는 방식이 모두 스승의 화법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전에 출품했어도 스승의 그림자가 짙게 스며들어 있어 심사위원들에게 선발되기는 어려웠다.

전주에서 개업한 ‘개척사’ 간판집은 호황을 이뤘고 이응노의 가산은 풍족해져서 고향에 돈을 보내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러나 늘 마음에 품었던 화가로서의 완성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잔치집에 초대를 받아 길을 나서게 됐다. 어슴푸레 달빛이 내린 초저녁 길을 서둘러 가던 중 대나무 숲에 다다르게 됐을 무렵 때마침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빽빽한 대나무 숲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이응노의 삶에서 대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이는 광경을 처음 마주하는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 이응노는 그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 처절한 몸부림. 자신을 가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어내고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환한 빛! 대나무 숲과 광풍의 조우는 이응노를 일깨웠고, 살아 숨쉬는 것, 기운생동함, 자기로부터 혁신되는 예술정신을 깊이 깨닫게 됐다. 기나긴 무명 화가의 길을 걸어온 지 7년 만의 깨달음, 이응노는 스승의 그림자를 지우고 바람이 일렁이는 대나무 숲에서 보았던 살아 꿈틀거리는 자신만의 <묵죽도>를 완성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청죽>(특선)과 <풍죽>(입선) 작품은 스승의 형식과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였다. 간결하고 불규칙하게 뻗은 대나무와 자유분방하게 여러 방향으로 흩날리는 대나무 잎들, 중봉으로 툭툭 쳐낸 괴석과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잎들은 가히 ‘이응노류’라 칭할만했고 해강 선생도 청출어람 한 그의 그림에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선전의 특선을 계기로 이후 매해 수상했고, 화단에서도 서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됐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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