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만춘 명창(方萬春 名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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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만춘 명창(方萬春 名唱)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 승인 2021.09.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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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虎咆哮山谷動
(여호포효산곡동)         

板橋大戰更無倫
(판교대전경무륜)

雄聲捲地加精細
(웅성권지가정세)

場樹歌枝將萬春
(場樹歌枝將萬春)

범이 포효하듯 내지르니
산골짜기가 뒤흔들렸다지
장판교대전 한 바탕
다시 견줄 사람 없었지

웅성이 땅을 둘둘 만 듯
이에 살세성을 더하였으니
장수(場樹)와 가지(歌枝)
만년토록 봄일레라 
 

[해설]
방만춘(方萬春: 1825∼?)은 전기 팔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출신이다. 11세 때 해미 일락사(日樂寺)에 들어가 십년 간 독공을 하고, 22세 때 서울로 올라가 이름을 떨쳤다. 

그 뒤 황해도 봉산에 있는 한 사찰에 들어가 4년간 연마하여 큰 명창이 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절의 기둥을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지르며 연마하다가 마침내 목이 틔어 득음을 하게 되었는데, 포효하는 듯한 방만춘의 소리에 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웅장한 소리로 당대에 손꼽혔다. 목청을 좌우로 젖혀 가면서 힘차게 내는 아귀성이 그의 주특기였다. 아주 가늘게 내는 살세성 역시 당대의 독보였다고 한다. 웅장한 데다 가늘고 굵은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니 소리 공력의 정도를 엿볼 수 있겠다. 특히 〈적벽가〉를 잘했으며, ‘장판교대전’ 불지르는 장면에서는 소리판이 온통 불바다가 되는 느낌을 주었다 한다. 

그는 시문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던 것 같다. 봉산에 있을 때에는 고을에서 음률을 알고 시문을 잘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적벽가>·〈심청가〉 같은 고전을 윤색하여 판소리 사설로 만들고 가락을 붙였다고 한다. 박황의 “판소리 이백년사”에 따르면, 방만춘이 심청무굿을 판소리화했다고 한다. 이것의 진위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판소리 삼백 년사에서 방만춘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전설이라고 본다. 

그의 소릿제는 중고제다. 전승 계보는 자세하지 않은데 손자 방진관(方進寬)이 그의 뒤를 이은 것으로 알려진다. 방만춘! ‘만춘’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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