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자·동학농민군·홍주의병 묻힌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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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순교자·동학농민군·홍주의병 묻힌 성지”
  • 한기원 기자
  • 승인 2024.08.0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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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의병의 무덤? 동학농민군의 무덤? 〈3〉

동학농민군은 홍주성 서문과 동문, 북문을 중심으로 공격했으며, 홍주의병은 홍주성 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방어적인 전투를 전개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유림이 중심이 된 민보군, 일본군의 토멸대상이었으며, 의병의 경우는 유림이 적극 참여했으나 정부는 오히려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의 경우는 대부분 석방됐다. 홍주의병대장 민종식도 체포됐으나 조정에 의해 석방됐다. 특히 홍주 지역에서 활동한 유림 중심의 민보군은 최후까지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다. 동학농민군은 홍주성 동문 앞을 흐르는 홍성천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냈고,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즉시 처형됐으며, 그 처형장이 바로 홍주의사총 앞을 흐르는 북문 앞 월계천과 간동이었던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시신의 수습 또한 유림의 활동이 왕성했던 홍주에서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1949년 4월 5일 수습된 9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유골로 볼 때, 의병의 경우 윤시영 홍주군수에 의해 대부분 연고자는 시신을 찾아갔으며, 시친자가 없는 83명만이 매장된 점, 동학농민군의 경우 희생자가 최소 200~700명, 최대 3만 명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 처형장이 홍성천, 월계천, 간동이었다는 점, 홍주성 전투 후 해미방면으로 퇴각했으며, 전투 후 민보군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시신 수습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 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홍주의사총의 유해는 1906년 병오 의병이라기보다는 1894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군의 희생자였을 것이라는 주장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한편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주변은 천주교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로도 추정되는 곳이다. ‘홍주·해미성지 자료집’과 증언 등에 따르면 ‘홍성의 옛 숲거리는 홍주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의 시신을 안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천주교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도 이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진 홍성의 숲거리는 1871년의 ‘홍주목지도’에도 홍주성의 동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 동쪽 건너편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바로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왼쪽 지역이다. 이 숲거리가 홍주성 밖의 전통적인 매장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홍주의 천주교 순교자(212명)들은 동학농민군(1894년)이나 홍주의병(1906년)보다 적어도 25년 이전에 처형됐으며, 한 번에 순교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순교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시신을 홍주성 밖 여기저기에 묻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1868년의 생매장 순교자들은 물론 옥사나 교수형으로 죽은 순교자들이 안장된 장소를 전통적인 매장지인 숲거리와 그 인근, 즉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인근으로 보는 견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천년의 홍주 땅,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주변은 천주교 순교자들의 생매장터, 동학농민군과 홍주의병이, 홍주성 전투로 인한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홍주의 성지(聖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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