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사색의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상태바
가을! 사색의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09.08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지금 ‘한글2007’이라는 프로그램에 의존하여 이 글을 쓴다. 누구에게 컴퓨터를 배운 적이 없어 소위 말하는 독수리타법을 사용하며, 프로그램 운영에 있어서도 고작 서너 개의 단축키와 몇 가지 기능을 알고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전문가에 비하면 ‘한글2007’의 일부분만 사용하는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한글2007’을 사용할 줄 안다”가 아니라, “나는 ‘한글2007’의 일부를 사용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글2007’에 아무리 많은 기능이 내제되어 있다 하더라도 미처 배우기 전에는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경험하지 않고 배우지 않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팔순의 내 어머니의 삶 속에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해 공유하는 사이버세계가 존재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붓다는 “한 생각이 한 세계를 만든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김치를 외국인들은 냄새를 싫어해서 기피하듯이, 각자 삶의 경험이 다른 개개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라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지게 보인다. 그래서 산(山)이 있어서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내(마음)가 있어서 산을 보는 것이 된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들은 유식(唯識)에서는 삼성설(三性設)로 설명한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가 뱀을 밟아서 깜짝 놀라 옆 사람을 껴안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라는 예를 들어 보자. ‘깜짝 놀랐을 때는 분명 뱀이었다’, ‘무엇을 뱀으로 보았는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새끼줄을 뱀이라고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마음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그것은 살아온 경험에 의해서 훈습(새로운 것에 대해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분별하여 받아들임이 이어지는 것)되어지는 것이다.

이때 뱀을 보고 놀란 것을(집착)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놀라게 된 것은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분별)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만약 ‘의타기성’이 분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변계소집성’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분별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불과한 자아(自我)를 실재라고 착각하여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일으키게 된다.

사실이 이러한 데도 세상은 자아를 완성해야 한다고 말하며, 서양철학은 분별지(의타기성)에 해당하는 사유와 사색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분별지는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켜왔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 할 수 없으나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행복을 전달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이것은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경치를 감상하는 등은 지적·정신적 즐거움은 있을 지언즉 객관의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분별(집착)하는 것으로 대상에 따라 마음 역시 계속해서 분별을 일으킴으로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는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에 무엇이 있을까?”를 궁구하는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이미 객관에 대해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은 곧바로 분별이 되기 때문이다.
먹물 옷을 입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필자도 아직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깊어 가는 이 가을 사색을 넘어 마음의 본래 자리를 함께 찾아가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소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힘들지만 주장자 법문을 소개해 본다.

선불교의 요체를 감고 있는 ‘선요(禪要)’에 고봉화상이 대중들을 모아 놓고 (주장자를 들어 보이고) 말씀하시기를 보았느냐! 사람사람이 눈에 눈동자가 있으니 보았을 것이다. (주장자를 한번 내리치고)이르시기를 들었느냐 각기 모두 살갗 밑에 피가 흐르는 죽은 자가 아니니 결코 들었으리라 (다시 주장자로 ○을 그리고서는) 보고들은 것은 곧 그만두고 다만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이 갖추어지기 전과 소리와 물질이 나타나기 이전을 듣지 않고 들으며, 보지 않고 봄이란 정 이러한 때에 이르러서는 무엇으로써 증험하겠는가?
이것은 “학문은 한 가지씩 덧붙여 넓혀 나가는데 있고, 도(道)는 한 가지씩 떨쳐나가 마지막 근본 한 자리로 돌아가는데 있다”는 말처럼 참다운 행복인 해탈은 마음이 마음을 물고 일어나는 사색을 넘어 깊은 의심의 궁구하는 참구에 의해서 도달되어진다고 한다.

특히 요즘처럼 SNS가 대중 여론을 형성하는 시대에서는 자칫 남들이 공급하는 정보에 의해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정신적 혼란이 가중될 때 향기로운 선지식들의 대화는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