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에 고전의 숲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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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에 고전의 숲을 거닐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10.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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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채 6개월도 남지 않았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어쩌면 정치의 계절이라는 표현 자체에 어폐가 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에는 5년마다 대선, 4년마다 총선과 지선, 간헐적인 재보선에 이르기까지 늘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문, 방송, 유튜브 등 거의 모든 매체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치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정치의 과잉’이라고 일컫는다. 정치의 과잉 때문에 종종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적지 않은 갈등이 초래된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싱가포르에서 보듯이 ‘정치의 결핍’이 바람직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의 계절이 도래했다. 선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선거 화두는 ‘좋은 삶’이다. 선거 때만 되면 후보자들은 제각기 ‘살기 좋은 나라’ 또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겠다고 각종 공약을 쏟아낸다. 유권자는 어느 후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공약을 꼼꼼히 살피고 결정한다. 교과서적으로 말해 더 좋은 정치를 통해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사람을 뽑는 게 선거,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현실이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구한 전통이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1510~1511)은 “고대 그리스의 뛰어난 철학적 사고 학당을 나타내고, 그들의 선구자, 주요 대표자 및 후계자를 구현해냈다”고 평가받는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을 통해 르네상스 정신 속에 유럽 문화, 그들의 철학 그리고 학문의 기원에 대한 고대 사상을 찬양한다. 그 중심에는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림 속에서 플라톤은 손을 위로 향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를 통해 플라톤의 학문은 ‘이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현실’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철학적 원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꽤 차이가 크다.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와 ‘국가’에 대해서도 그들은 총론에서는 비슷하지만 각론에서는 크게 엇갈린다. 주지하듯 현대의 정치철학은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시작한다. 얼마 전 우연히 ‘서양 고전학자들이 들려주는 문사철 탄생의 10’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전의 고전》(2019)을 읽었다. 그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꼭지를 읽다가 문득 예전에 읽었던 《국가》와 《정치학》이 생각났다. 《국가》와 《정치학》으로 심란하고 어수선한 정치의 계절에 고전의 숲을 거닐어 본다.

주지하듯 플라톤의 《국가》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플라톤은 ‘강자에게 유익한 것’을 정의로 본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한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정의를 이익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배려의 철학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엇보다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질문에 “스스로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 정의”라고 답한다. 더 나아가 그는 정의로운 자는 자기배려를 했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정의를 존중하는 것은 정의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를 저지를 수 없는 허약함, 다시 말해 불의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불의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을 힘이 있는 사람은 정의를 존중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불의를 저지르고 정의를 존중하지 않은 예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물론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정의를 실현하는 게 정치 행위이고, 그 정치 행위를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계급이 통치자다. “통치자가 할 일은 시민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한다. 반대로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즉 자기이익만 탐하는 사람이 통치를 맡을 때 그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는 명약관화하다.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하려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고, 그들에게는 어떤 강제나 벌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주지하듯, 훌륭한 사람이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받는 것이다.” 이를 더 확장시키면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플라톤은 국가를 필요의 산물로 봤으며, 자기만의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다. 범박하게 말해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나라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성원들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불화도 없어야 한다. 둘째, 구성원들이 자기가 맡은 일에 만족해야 한다. 셋째, 통치자는 시민들의 행복을 목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는 계급을 각각 통치자-수호자-생산자로 나누었고, 구성원들이 고유한 덕에 따라 제 할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때, 즉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질 때 정의로운 국가가 실현된다고 봤다. 사회적 분업이 적절하게 구축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영혼의 돌봄이 전제돼야만 한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정의로운 나라는 크게 성장하는 강대국이 아니라 지혜, 용기, 절제가 조화를 이루며 시민들이 하나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춘 국가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관해서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된 ‘계급론’, ‘사유재산’ 불허, 그리고 ‘처자’ 부정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계급론은 운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사유재산 불허와 처자 부정은 맥락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사유재산을 불허하고 처자를 부정한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의 이기심을 촉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유재산 불허와 처자의 부정도 대체로 통치자에게 국한된다. 즉 그는 통치자의 도덕적 엄격성을 그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이다. 그는 교육도 강조한다. 그는 생산자,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시민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으로 가르치고 기르는 일을 국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노력을 경주해야 할 유일한 정책으로 간주한다. 통치자의 도덕적 엄격성과 교육의 강조는 ‘보수적인 개혁가’로서의 플라톤의 면모를 잘 예거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좋은 나라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으로 그 유명한 ‘철인통치’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나라, 즉 이상 국가에서는 철학자가 통치자이어야 한다. 혹은 통치자는 철학자이어야 한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치체제는 ‘아리스토크라티아’, 즉 ‘귀족정체’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귀족은 신분으로의 귀족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이고, 따라서 귀족정체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그의 정치철학은 다른 철학과 마찬가지로 ‘이상’, 즉 이데아로 수렴된다. 그런데 그가 다른 저작 《법률》에서 현실의 한계를 고려해 법에 의한 통치, 즉 ‘법치’를 제안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즉 《국가》에서 ‘최선의 나라’를 꿈꾸었다면 《법률》에서는 ‘차선의 나라’를 제시하고 있다. 플라톤의 생각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정치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정치인은 아름다운 나라가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어떻게 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나라에 가까운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의 목적을 “최고의 선”으로 규정하고, 플라톤에서 시작된 도덕적이고 고귀한 삶을 진작시키기 위해 폴리스를 새롭게 개조하려는 작업을 완결한다. 그는 국가를 ‘필요의 산물’로 간주한 스승 플라톤과 다르게 정치적 공동체인 폴리스를 자연적 실재물이라고 주장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은 폴리스가 그런 것처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행복과 폴리스의 행복을 동일화한다. 단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은 ‘나보다는 우리를 지향하고 선한 공동체 건설해야 한다.’ 이는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정치가는 반드시 좋은 인간이어야 하고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해야 한다. 정치가는 마땅히 ‘실질적인 정치적 앎을 가진 자’로서 최선의 것뿐만 아니라 가능한 것도 고찰할 수 있어야 한다.

거시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목표는 모두 ‘선한 생활의 실현’으로 수렴하지만 미시적으로 조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정치적 목표는 선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처럼 이미 정해진 것으로서 절대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목표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질을 근거로 하기에 상대적이다. 둘의 정치적 목표의 차이는 원하는 국가 또는 원하는 정치체제의 차별로 귀결된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철학적 공산주의 국가다. 그의 이상 국가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금욕적이고 변화가 없는 이데아의 세계를 현실에 옮겨놓은 세계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소규모 폴리스, 즉 도시국가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관심사는 ‘어떤 정치체제가 최선일 수 있는가?’이다. 그는 정치체제를 “모든 시민의 삶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 정치체제는 폴리스의 어떤 종류의 삶을 가리킨다. 그는 정치체제의 유형을 분류하고 올바른 정치체제와 그렇지 않은 정치체제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체제에 관계없이 공동의 유익함을 위해서 지배할 때는 올바르고, 개인의 유익함을 위해서 지배할 때는 타락한다. 즉 공동의 유익함을 진작시키는 정치체제는 정의롭고, 단지 지배자의 이익만을 위한 것은 정의롭지 않다. 사실 그는 왕정 또는 귀족정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파악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귀족정과 민주정이 혼합된 정치체제를 선호했다. 왜냐하면 이 정치체제에서는 다른 정치체제보다도 다수가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귀족정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다름 아닌 ‘도덕적 탁월성’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다르게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아니라 최선의 정치체제를 모색한다. 즉 그는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현존하는 폴리스의 개선에 관심을 기울인다. 폴리스는 모든 시민들이 번갈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관직을 지배하는 정치체제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폴리스의 전제 조건은 좋은 시민이다. 좋은 폴리스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좋은 시민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인간은 도덕적 덕과 실천적 지혜가 있어야 도덕적 자각 능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적 자각능력은 본성이 아니라 습관화와 교육을 통해서 함양된다. 습관화화 교육은 정치적 수단과 폴리스의 법을 통해 가능해진다. 습관과 교육을 통해 모든 시민은 훌륭해야 하고 각각의 시민 또한 훌륭해야 한다. 시민은 정치체제에 적합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폴리스가 각각의 시민을 돌본다는 것은 전체로서 폴리스를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종류의 덕과 관련해서 다중, 즉 다수의 시민들이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평범한 다수의 시민들이 한 명의 뛰어난 개인보다 더 잘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수의 시민들에 대한 그의 믿음은 오늘날 ‘다중지성’ 또는 ‘집단지성’의 긍정으로 연결된다. 그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은 최선의 개인보다 열등하지만, 시민을 집단적 숙고를 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체,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 생각해 볼 때는, 전체로서의 인간들이 더 낫고 지혜롭고,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 정의와 덕은 혼자서보다 집단에서 더 잘 발휘될 수 있다. ‘다수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소수의 지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파스칼의 내기’와도 비슷한 이 경구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혹은 포기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이유 가운데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정치의 계절에 고전의 숲을 거닐며 얻은 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뿐이라면 너무 소박한 걸까? 하지만 늘 그렇듯이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소박하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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