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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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부끄러움
  • 강희권 칼럼위원
  • 승인 2019.02.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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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100년이 되는 해다. 그 역사적 무게감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유난히 관련 행사가 많다. 애국선열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홍성·예산은 더욱 분주하다.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매헌 윤봉길.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하는 선열들이 애국충절의 눈부신 광휘를 우리에게 비춰준다.

함성과 깃발만의 전쟁이었지만 3·1운동은 독립운동사 최고의 분수령이었다. 그 강렬한 메아리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배에 고통 받던 제3세계 민중들을 향해 민족자결의 희망을 쏘아올린 위대한 신호탄이 됐다. 기미년을 기점으로 우리 민족은 반일과 항일을 넘어 무장투쟁으로 나갔고, 마침내 후손들에게 독립이라는 자랑스러운 열매를 남겼다. 그날로부터 한 세기, 온갖 간난신고를 다 지나고 마침내 시민의 촛불로 세운 정부에 이르렀으니 마지막 독립지사 한 분까지도 찾아서 모시겠다는 정성이 더없이 아름답다. 진정한 보훈의 마음이 선열들의 충절을 더욱 빛나게 하는 3월이다.

하지만 호사다마인지 한 세기를 맞는 자랑스러운 잔치마당이 뜬금없는 날파리 떼로 어지럽다. 이런 것도 내우외환이라 해야 하는가.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는 두 무리가 마치 손발을 맞추기라도 한 듯 나라 안팎에서 망언을 쏟아내며 잔치 분위기를 흐린다. 밖에서는 자민당이 일제 만행을 덮겠다고 적반하장격으로 도발하고, 안에서는 적폐잔당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모욕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망언 잔치를 벌인다. 일말의 부끄러움도, 한 줌의 상식도 없다. 두 무리의 공통점은 이미 확연한 역사적 ‘진실’을 애써 부정하는 데 있다. 진실을 부정하는 집단의식에는 대체로 ‘공동정범’의 심리가 숨어 있다. 자신의 악행이 아님에도 필사적으로 옹호하는 까닭은 악행의 주체가 바로 자신의 뿌리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는 일제의 만행을 부인하는 무리가, 안에는 군사독재의 학살을 부인하는 무리가 마치 동맹군처럼 버티고 있다. 일제가 씨 뿌린 친일파가 군부독재로, 또 적폐세력으로 이어졌으니 둘이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의 망발과 패륜에는 ‘진실’ 이후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진실 자체를 욕보이는 진흙탕 싸움을 도발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라 밖 광장에서는 욱일승천기가 휘날리고, 나라 안 광장에서는 태극기가 모욕을 당한다. 안팎 어디서나 희생자들을 상대로 패륜이 난무한다. 집단최면이자 거대한 ‘진실공포증’의 히스테리다. 그러나 개가 아무리 짖어도 기차는 달리고,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역사는 흐르는 물처럼 스스로 길을 만들며 나간다. 때로 외세라는 산을 만나 멀리 돌아가야만 하거나, 독재라는 사막을 만나 숨어서 흘러야만 할지라도 역사는 결국 시냇물로 모이고 강을 이루어 마침내 공명정대, 진실의 바다에 이른다.

그날의 위대한 함성으로부터 한 세기, 선열들의 항일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는 과연 극일을 이루었는가. 나라 안팎의 저 망발들마저도 후손인 우리가 부족한 탓인지라 마음이 무겁다. 더럽혀진 눈과 귀를 씻고 계실 선열들 뵙기도 죄스러운 봄날, 백년 전 그날의 비분강개를 떠올려 본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가치를 위해 떨치고 일어선 그날의 함성, 그 ‘슬픈 분노’가 새삼 그립다. 옥암리 회전교차로 바위에 오래 잊지 말자고 새긴 마음을, ‘충절’ 두 글자를 가슴으로 읽어야 하는 3월이다.

강희권 <더불어민주당 홍성·예산 지역위원회 위원장·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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