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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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 전만성(화가, 갈산고 교사)
  • 승인 2009.10.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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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옹기토․화장토)


몇 해 전 고향에 가는 길에, 지금은 고인이 된 당숙을 뵈러 갔을 때 당숙이 그러셨다. "자네가 능소화 뿌리를 좀 구해다 주게. 중풍에 그게 좋다는 군." 당숙은 그 때 중풍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누워 지내던 끝이었고 연세까지 많으시니 당숙의 자식들은 물론 나도 당숙이 다시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당숙이 농민신문에 밑줄까지 그려 놓으셨다가 나에게 말씀하신 걸 보면 그냥 해보는 소리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얼른 생각나는 게 내가 사는 동네에 헌집을 부수고 새로이 집을 짓고 있는 이장님 댁이었다. 이장님 댁을 지날 때마다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던 능소화가 기품이 있는 듯 보기 좋았는데, 집을 헐고 있으니 이런 때라면 그 뿌리를 구하는 것이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쉽게 대답을 해 두었다. 또 내가 못한다 해도, 자식들이 있으니 꼭 필요한 거라면 갖다 드리겠지, 안이한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 해 여름이 끝날 무렵 고향으로 참초를 하러 갔다가 당숙을 다시 뵈었을 때 대뜸 능소화 뿌리를 구해 왔느냐고 그것부터 찾으셨다. 아뿔사!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내가 실수를 했구나 싶은 게 여간 죄송한 게 아니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장님 댁 앞마당을 이리저리 뒤져봤지만 그 때까지 나 가져가라고 능소화 뿌리가 있을 리 없었다. 고민이 되어 친구에게 능소화 뿌리 구할 데 없느냐고 한 게 초사였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삽을 찾아 둘러메고는 어디론가 앞장을 섰다. 말릴 겨를도 없었다. 

친구와 내가 도착한 곳은 나지막한 동산 기슭이었는데 거기에 누가 심었을 것 같지는 않은, 그러나 한참 보기 좋게 건강하고 싱싱한 능소화 한 그루가 바지랑대만한 고목을 타고 오르며 피어 있었다. 친구가 바지랑대만한 고목 아래에다 삽을 찌르고는 힘을 주기 시작했다. 뿌지직! 무언가 팽팽한 것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흙 한 삽이 뒤집혀 올라 왔고 친구는 지체하지 않고 흙을 뒤져 뿌리를 추려 냈다. 아직 제 몸 아래가 몽조리 끊어진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능소화는 고목에 제 몸을 기댄 채 여전히 아리따운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고목이 받쳐주는 능소화는 완벽한 작품이었다. 운치와 여백을 갖춘 한 폭의 문인화였다. 그런 것의 목숨을 끊어버리다니! 도무지 내가 저지른 범행을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친구는 냉정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이 까짓 꽃이 문제냐?"

어쨌거나 고민거리가 해결되고 보니 마음이 느긋해져서 당숙에게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차에 일이 안 될려고 그랬는지 그 때 마침 당숙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왔다. 돌아가셔도 참 어려운 때, 직장일도 바쁘고 집안일도 많은 때 돌아가셨다고 탓하고, 장례에 참예하자니 직장에 휴가를 내고 복귀하는 일 또한 번거로워 당숙이 어떻게 사시고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하고 장례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베란다 청소를 하다가 능소화 뿌리를 담은 비닐봉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말리자고 애꿎은 능소화만 죽게 했나! 또 한 번 마음이 짠해 왔다. 

이듬해 봄, 우연히 범행의 자리를 지나다가 깜작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거짓말처럼 능소화 이파리가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그것이 환영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을 보아도 분명 환영은 아니었다. 뿌리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수도 있구나. 오, 대견한 것! 한 폭의 문인화가 될 때까지 어서어서 자라기를 바라며 속삭였다. 얘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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