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유형문화재 제118호 ‘용봉사마애불’
상태바
충남유형문화재 제118호 ‘용봉사마애불’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5.01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6〉

용봉사 일주문을 지나 절과 중간지점 왼편에 용봉사마애불(충남유형문화재 제118호)이 서 있다. 마애불은 바위나 절벽의 평평한 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이 마애불은 바위 면에 일정한 구획을 한 후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입상이다. 육계는 민머리 위에 팽이를 엎어놓은 모양처럼 솟아있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눈과 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가늘고 긴 눈은 거의 일자형이나 끝부분이 약간 치켜져 올라가 있다. 코는 오똑한 편이며, 좌우 광대뼈 부분은 약간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있다.

입은 얼굴 크기에 비해 작고 얇으며 턱은 살이 붙어 이중으로 겹쳐져 있다. 귀는 목 부분까지 길게 늘어지게 표현했다. 어깨는 둥글게 처리 됐으며, 의습은 통견으로 U자형의 옷 주름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있지만, 얇게 표현돼 있어 불상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 마애불은 신라 소성왕 1년(799)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계란형 얼굴에는 미소가 희미하다. 미소도 세월에 조금씩 닳아졌을 것인데, 이 부처님은 표정도 차림도 소박하다. 귀가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조각됐는데, 부디 중생의 소리를 많이 들어달라는 민초들의 기도가 아니겠는가.

용봉사 입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높이가 2.3m(현재 높이 2.1m)로 거대한 절벽의 바위 면이 세모꼴로 떨어져 나간 곳에 감실형으로 쪼아 부조를 새긴 불상이다. 오른쪽 어깨 옆의 바위 면에는 3행 31자의 불상조성기(銘文)가 새겨져 있다. 

거구의 이 불상은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부조한 반면 하체로 내려가면서 얕게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얼굴이 큰 데 비해 손이 유난히 작고, 눈이 가늘면서 입 주위를 움푹 들어가게 조각해 파격적인 미소 띤 얼굴을 표현했다. 하지만 발목 부분이 불분명해지는 등 우열의 수법이 공존하는 독특한 조각이다. 머리 정상부는 선각으로 구획한 육계(肉髻)가 솟았는데 큼직한 팽이 형으로 육계와 머리는 선으로 구별 짓고 있을 뿐이며, 머리칼은 소발이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꽤 풍만한 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입 좌우를 들어가게 하여 만면의 미소를 표현했다. 눈썹은 반달형으로 코는 좁고 오뚝한 편이다.

입은 폭이 좁고 작아서 인상적이다. 입은 코끝에서 턱을 이루면서 반달 같은 보조개를 이룬 표정과 함께 만면한 미소를 띠고 있다. 더구나 눈을 가늘게 만들어 눈웃음을 짓게 한 표현과 더불어 파격적으로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이루게 했다. 이로써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신체는 원통형인데 어깨는 비교적 자연스럽고 가슴은 양감 없이 밋밋하게 표현됐다. 하체의 처리 또한 상체와 비슷하여 두 다리는 굴곡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무릎 아래 하반신의 표현이 불분명하고 발은 나타내지 않았다.

용봉산의 봉우리에 있는 신경리마애석불상(洪城新耕里磨崖石佛像, 보물 제355호)과 마찬가지로 다른 돌에 발을 새겨 끼워 놓았던 것으로 아무렇게 놓여 있었던 것을 앞에다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돌로 발을 표현하는 수법은 이 시대 비상(碑像)인 인양사조사상의 예도 있어서 마애불의 발 표현의 한 방법으로 유행했던 것 같다.

불의는 통견의(通肩衣)인데 가슴의 옷깃이 불분명하지만, 목 주위로 돌고 있어서 굽타 불상 착의법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옷 주름은 무릎까지 전신에 걸쳐 U자형을 선각으로 표현했다. 무릎 밑은 군의(裙衣)를 세로선으로 나타냈지만 불분명하게 처리됐다. 광배(光背)는 바위를 파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주위를 깊게 새겨 감실형의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을 형성했으나 뚜렷하지는 않다. 머리 위에서부터 바위 면이 삼각형으로 떨어져 나간 채 그대로 방치돼 이 불상의 인상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이처럼 이 불상은 일면 불균형한 점도 있어서 고려시대 조각 양식과 상통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일면 자연스러운 신라식 기법도 보여 주고 있어서 지방 양식이 강하게 나타난 통일신라 불상으로 추정된다.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
(정원십오연기묘사월일인부)
○佛願大伯士元烏法師
(○불원대백사원오법사)
○○徒官人長珍大舍
(○○도관인장진대사 ) 

위의 조성기를 보면 불상 오른쪽의 명문에는 ‘貞元十五年(정원 15년)’이란 글이 새겨져 있어 799년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799년(소성왕 1년) 4월에 조성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가(元烏法師)와 발원자(長珎大舍) 등도 있어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한 기준의 작품이 된다는 점에서 이 불상은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용봉산의 신경리마애석불의 편년 설정에도 결정적 자료로 가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