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사의 옛 용봉사지 석조, 석구, 마애,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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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사의 옛 용봉사지 석조, 석구, 마애, 부도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5.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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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8〉

1905년에 새로 지은 지금의 용봉사(龍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末寺)로 홍성군 홍북읍 신경리 용봉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본래의 옛 용봉사는 창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사찰 주위에서 발견된 기와들로 보았을 때 백제 말인 600년대에 처음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용봉사는 110여 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양 조씨 가문에서 옛 용봉사 터에 묘를 조성하기 위해 용봉사를 폐사 시켰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확한 시기는 평양 조씨의 묘비명으로 보아 1906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에 주민들과 신도들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본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 아래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용봉사의 가람배치는 남동향으로 3단의 대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정측면 각 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의 대웅전이 있다. 그 아랫단에는 동편에 치우쳐 요사채가 있고, 서편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의 앞에는 탑재석과 목부분을 수리한 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최하단에는 평탄대지와 구분해 1단의 축대를 쌓고 동편에는 사지 주변에 있던 석조, 맷돌, 절구 등의 석제품을 옮겨놓았다. 현재 용봉사에는 대웅전, 지장전, 삼성각, 적묵당, 일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주변에는 신경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355호),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2호), 마애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용봉사지석조(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부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8호) 등이 있다.
 

■ 용봉사지석조(마애,석구,석조·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2호)
용봉사의 옛 터에 남아 있는 3기의 석조물로, 자연석을 깍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돌수조인 ‘석조’는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는 것으로, 안이 파인 직사각형 모양이다. 돌절구인 ‘석구’는 돌의 속을 파내어 그 구멍에 곡식을 넣고 찧던 절구이다. ‘마애’는 곡식을 가는데 쓰이는 맷돌이다. 크기가 거대해 옛 용봉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백제시대의 유물로,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찰의 창건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용봉사지 출토 석조물에는 돌수조(石槽)와 맷돌, 돌절구 등 3기가 있다. 석조는 긴 축 290㎝, 짧은 축 136㎝, 높이 136㎝ 정도의 긴 직사각형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가공 석재의 형태에 따라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폭을 좁혀서 만들어 윗면의 크기는 240㎝×104㎝×45㎝이며, 바닥의 크기는 116㎝×83㎝의 크기이다. 석조 안쪽의 바닥에는 저장했던 물을 배출하기 위한 원형의 배수공(排水孔: 지름 18㎝)을 두었는데, 장축 쪽으로 치우쳐 뚫었다. 또한 주연부(周緣部)의 한쪽 모서리에는 폭 10㎝, 깊이 7㎝의 홈이 파여 있으며, 아울러 장축의 주연부 한쪽에는 일단(一段)의 층급을 주고 있는 게 특징이다.

맷돌은 모서리가 좁아든 긴 타원형의 화강암으로 길이 160㎝× 폭 150㎝의 크기로 가공했는데, 지금은 분리돼 위 부분의 맹이는 용봉사 아래로 옮겨져 있고, 아래 부분의 맹이만 용봉사지 옆 계곡에 남아 있다. 아래 부분의 맹이는 긴 타원형 안쪽의 중심부에 원형으로 지름 54㎝, 높이 3㎝의 맹이를 두었고, 그 중앙에 지름 7㎝, 깊이 10㎝의 돌저귀 구멍을 냈다. 위 부분의 맹이 역시 아랫부분의 맹이와 비슷한 크기로 가공했는데, 지름 52㎝, 높이 22㎝의 규모이다. 아래 면에는 지름 7㎝, 깊이 8㎝의 돌저귀 구멍을 만들었다. 그런데 위 면의 맹이에 있어야 할 손잡이를 끼울 수 있는 홈이 파여 있지 않은 것은 의문점으로 남는다.
 

■ 용봉사부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8호)
용봉사의 부도는 사리탑으로, 모셔둔 사리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래는 이 절 근처의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1910년 경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바닥돌이 없어진 채, 기단(基壇)과 탑신(塔身)만이 남아 있는데, 기단은 심하게 닳아 조각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고, 둥근 공을 살짝 누른 듯한 모양인 탑신의 몸돌은 특별한 꾸밈을 두지는 않았다. 지붕돌은 6각으로 이루어진 듯하나 각 부분이 심하게 닳았으며, 꼭대기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머리장식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가고 있으며, 제작된 시기도 알 수가 없지만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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