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충신 최영 장군의 사당 ‘기봉사(奇峯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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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마지막 충신 최영 장군의 사당 ‘기봉사(奇峯祠)’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6.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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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10〉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114-1의 산록에는 최영 장군 사당인 ‘기봉사(奇峯祠)’가 자리하고 있다.
최영 장군의 사당인 ‘기봉사’는 현재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닭제산 정상 인근 비탈면에 돌담을 이용해 터를 닦고 1995년 새롭게 조성했다. 기봉사안에는 최영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최영 장군 사당인 기봉사를 중심으로 풍수가 좋아서인지 주변에는 푸르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난 최영 장군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며 정치인이었다. 아산에 있는 맹사성고택의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했던 최영 장군은 1388년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회군을 한 이성계에 의해 경기도 고양에 유배됐다가 개경으로 소환된 뒤 죽임을 당했다. 

무속에서는 최영 장군을 수명장수와 소망을 비는 태평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고려의 마지막을 지킨 중심인물로 두 명을 꼽을 수 있는데,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던 정몽주와 무력으로 고려를 지켰던 최영 장군이 바로 그 인물이다. 

홍성을 비롯한 내포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많은 역사인물들 중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청렴을 강조한 고려 마지막 충신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은 홍성을 대표하는 역사인물 중 한 명이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최영 장군의 성품을 평가하면서 ‘강직하고 충실하며 청렴하다’라며 ‘지위가 재상과 장군을 겸했지만 간혹 식량이 떨어질 때도 있을 정도’라고 여러 차례 최영 장군의 청렴을 강조하고 있다. 최영 장군은 살아 고려인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청렴의 상징이었으며, 죽어서는 민중이 소망을 비는 수호신으로 남았다.

최영 장군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것은 청렴함과 당시 고려사회 특히 충남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왜구의 난동을 격퇴시켰기 때문이다. 고려 말 왜구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충남은 78회에 걸쳐 38개 지역을 침입을 당했다. 

이는 침입 횟수는 경남(97회)에 이어 두 번째지만, 침입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왜구의 규모는 많은 때 400척 이상 대선단으로, 해안뿐 아니라 하천으로 내륙 깊숙이 침입해 노략질과 인신납치를 일삼아 피해는 상상 이상 광범위하고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같은 왜구를 상대로 충청권을 지켜내 수도를 방어한 것은 최영 장군이었다. 왜구들은 1376년 금강을 거슬러 부여, 석성을 거쳐 공주를 함락시키고 연산 개태사를 도륙했지만, 최영 장군에게 홍산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돼 더 이상 고려에 대규모 침략을 못하게 됐다. 

최영 장군의 생가 터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청도읍지 ‘홍주목’에서는 현재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 적동마을로 밝히고 있다. 홍북읍 노은리는 충남도청이 새로 들어선 내포신도시와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최영 장군과 관련된 구전이 홍성지역 여러 곳에서 전해오고 있다. 금마면 철마산(鐵馬山)은 장군이 말을 타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노은리의 작은 우물터는 지금도 마을 사람들에게 ‘최영 장군 우물터’로 불리고 있다. 홍북읍 노은리 삼봉산 정상에는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금마총과 용봉산에도 최영 장군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 이후 고려정권의 핵심이었던 최영 장군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각돼 참수되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데, 최영 장군은 처형에 앞서 “내가 평생에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으로 불렸는데 1970년대부터 풀이 돋아 현재는 무성해졌다고 한다. 600여 년 만에 그의 억울함과 노여움이 풀려서일까.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우고 6년 만에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넋을 위로했다. 비록 정적이었지만 최영 장군의 충절과 청렴함에 깊은 존경심을 보여준 일이라 할 것이다. 살아서는 청렴의 상징이요, 죽어서는 민중의 수호신이 된 최영 장군의 생애와 업적, 영력으로도 많은 민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홍성에서는 1995년 제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비롯해 해마다 역사인물축제를 통해 장군의 충의와 공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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