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북 중계리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상태바
홍북 중계리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6.19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관우의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12〉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이응노로 67-1에 자리한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은 이응노가 탄생하고 유년의 성장기를 보낸 곳이다.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은 대지 면적 2만596㎡, 건축 면적 1002㎡로 전시 홀, 북 카페, 다목적실 등 전시 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과 초가로 지어진 생가, 연꽃 단지, 산책로 등을 갖춘 기념관이자 미술관이다. 홍성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 이응노 화백의 생가지에 생전의 예술 혼을 담아낸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은 지난 2011년 11월 2일 개관했다. 홍성군은 70여억 원을 들여 어린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가 옛 모습대로 복원했고, 기념관(미술관)도 함께 문을 열었다.

 

이응노 화백이 태어난 홍북읍 중계리는 백월산, 용봉산, 오서산, 대흥산, 홍동산, 덕숭산, 가야산 등 해발 500m가 채 되지 않는 산줄기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너른 평야지대의 낮은 구릉지에 자리하고 있다.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싸고 백월산 줄기 등 사방이 산릉으로 이어진다.
이응노는 나이 열일곱에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을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깊었던 이응노에게 엄격한 선비 집안의 분위기가 오히려 걸림돌일 뿐이었을 것을. 당시만 해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천한 것들의 짓, 환쟁이라는 인식이었으니까. 집을 나온 이응노는 당진의 송태회 선생을 통해 묵화의 기본을 배웠고, 경성에서는 서예가 김규진의 문하에 들어가 사군자, 서예, 묵화 등을 배웠다고 한다. 이응노가 정식으로 화단에 등단한 것은 1924년 조선미술전(선전, 해방 이후의 국전)에 입선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공주, 대전 등에 살며 작품 활동을 했고 1928년, 25세의 나이에 전주에 정착하며 ‘개척사’라는 간판 가게를 열기도 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응노는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화가들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세계 미술의 흐름과 기법을 배우는 게 보편적 꿈이었다고 한다. 이응노는 일본 도쿄의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미쓰바야시 게이게쓰가 연 ‘덴코화숙’에 입문해 신남화풍의 사경화를 배우면서 ‘신문배급소’를 열어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 시기 이응노는 일본미술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 등 일본과 조선의 대표적인 미전에 입선했고, 서울 화신화랑에서 생애 최초의 개인전 ‘남화신작전’을 열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한 이응노는 고향으로 돌아와 수덕사 입구에 있는 수덕여관을 사서 동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울로 올라가 ‘고암화숙’을 열었다.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경주 서라벌예술대학 동양화과 등에서 교수로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1957년 54세의 나이에 국전의 폐단을 주장하면서 국전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중단했고, 뉴욕과 파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며 자신의 작품을 국제 화단에 선보였다. 

1957년,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이었던 자크 라세느는 이응노에게 프랑스에서의 활동을 권유해 다음해인 1958년 프랑스로 갔다. 이응노에게 파리는 유럽이었고 세계무대였다. 이응노는 파리 이주 이후 세계 화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동백림사건’이라는 시련이 닥쳤다. 유럽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예술가들 중 일부가 북한에 다녀오거나 북한 대사관과 접촉했다는 것인데,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윤이상, 이응노 등은 간첩죄가 빠지면서 2년 남짓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윤이상은 독일로, 이응노는 파리로 다시 돌아갔다. 

2년 6개월을 복역하고 출감한 이응노는 파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수덕사의 수덕여관에 머물며 바위에 암각화 형태의 문자 추상을 새기기도 했다. 파리로 돌아간 뒤 이응노는 남북한 냉전 상황 속에서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1989년 1월 10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응노는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유해는 시립 페르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오직 그림만 그렸고 그림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22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땅 언덕에도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처럼 자신을 기념하는 언덕이 생겼으니, 행복하지 않을까. 

이응노가 미술 세계로 출가한 나이가 17세였고, 다시는 고향 땅에 돌아오지 못했으니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이 문을 연 2011년, 그의 영혼이 고향 땅을 밟은 날이다. 이응노 생가·기념관은 단순한 복원 시설이 아니다. 이응노 화백이 생전에 사용했던 화구 등 유품과 대표작이 전시돼 있고, 고암 이응노 화백을 사랑하는 문화예술계 인사와 수집가들이 기증한  작품도 보관돼 전시되고 있다. 전시실에서는 관련 기획전도 연중 열리고 있다. 아담한 북카페는 생가·기념관의 뜨락과 함께 멀리 보이는 시골 농촌의 사계절 풍경은 고암의 그리움을 담는 화폭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