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도시로 정체성 다져가는 천년고도, 의향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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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도시로 정체성 다져가는 천년고도, 의향 나주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0.11.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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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8〉
나주시전경.
나주시전경.

 나주시민의 날, 1929년 10월 30일 나주 학생들의 기개와 긍지 이어가
 옛 나주역사에서 일본인 학생의 희롱과 모욕에 분연히 맞섰던 날 기념
 천년고도 나주정신 복원, 역사문화도시 위상 정립, 역사적 정체성 회복
 “호남의 중심도시 나주라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

“나주역 댕기머리 충돌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을 댕긴 도화선이었요.”
전남 나주시가 항일도시의 정체성을 다져가고 있다. 나주시는 지난해 10월 30일 죽림동 옛 나주역사 일대에서 ‘시민의 날 기념식’을 열고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을 제막했다. ‘나주시민의 날’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5분 옛 나주역사에서 일본인 학생의 희롱과 모욕에 분연히 맞섰던 나주 학생들의 기개와 긍지를 이어가기 위해 제정됐다. 당시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와 다나카 등 3명이 역사 개찰구에서 광주여고보 박기옥과 이광춘 등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고 밀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본 광주고보 학생 박준채가 항의했고, ‘조선인 주제에’라는 모멸을 당하자 따귀를 올려붙이는 바람에 집단적인 격투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1월 3일 광주지역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고 학생 5만 4000명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됐다.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결국 91년 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는 나주역이다.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주시는 옛 나주역사 야외광장에 높이 7.9m의 기념탑을 세웠다. 꼭대기에는 운동을 촉발시킨 조선인 학생 3명의 동상을 만들고, 동상의 받침은 전국 8도를 상징하는 8각형으로 제작했다. 하부에는 학생이 주체였음을 상징하는 책을 펼치고 책장에는 ‘10·30’과 한반도기를 새겼다.
나주시는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 희생자가 숱하게 발생했던 나주읍성 전투를 재조명하는 사업과 행사도 꾸준히 진행할 계획이다. 이러한 일환으로 나주시는 나주읍성을 점령하려다 현대식으로 무장한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대규모로 학살당한 농민군을 위령하는 상징물도 구상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듯 의향 나주의 정신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나주는 1970~90년대 수세싸움 등을 벌였던 농민운동의 근거지였고, 지금까지도 농민회 조직의 뿌리가 튼튼하다.

■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여학생 희롱사건
사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말은 나주에서 시작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됐기 때문이다. 이날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이 충돌했다.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했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등과 싸움이 벌어진 것.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됐고, 일본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왕 메이지(明治, 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00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나주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당시 발행된 일어신문)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또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으로 충돌해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에는 광주고보만이 아니라 광주여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했다.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신간회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했고, 청년조직인 조선청년동맹과 학생전위동맹도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학생비밀결사인 성진회를 모태로 해 결성된 독서회중앙본부의 장재성 등은 광주의 사회단체들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해 학생들의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했다. 

당시 장재성은 광주지역 학생들의 행동지도를 맡았고, 장석천은 시위의전국적 확산, 국채진은 전남지역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와 노동단체 지도, 임종근은 전남지역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들과의 연락, 강석원은 외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그리고 11월 7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박일, 조선청년동맹의 부건 등과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이들은 11월 11일 저녁에 격문을 살포해 11월 12일 광주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이 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돼 구금됐으며, 광주지역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 천년고도 목사고을 나주읍성 4대문 복원
천년고도 목사고을 나주(羅州)를 상징하는 나주읍성 4대문이 지난 2018년 12월 24일 열린 북망문(北望門) 낙성식과 함께 모두 복원됐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남고문(南顧門) 철거를 통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던 나주읍성 4대문은 이로써 101년 만에 남도 대표 읍성의 위용을 되찾게 됐다.

사적 제337호 나주읍성은 서울 도성(都城)과 같이 고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4대문을 비롯해 객사인 금성관, 동헌(제금헌), 목사내아 관아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전라도의 대표 석성(石城)이다. 전체 둘레 3.7㎞, 면적 97만 2600㎡규모로,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모습은 조선시대 나주로 부임한 목사 김계희(1457~1459)에 의해 완성됐다. 하지만 1910년대 일제 강점기 때 성문은 철거되고, 성벽이 크게 훼손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에 나주시는 천년고도 나주정신의 복원과 역사문화도시 나주의 위상 정립, 역사적 정체성 회복을 위해 지난 1993년 남고문(南顧門) 복원을 시작으로 나주읍성 4대문 복원사업을 추진해왔다. 

지난 2005년 10월 동점문(東漸門)과 2011년 10월에 영금문(映錦門, 또는 서성문)복원을 완료했으며, 2018년 북망문을 끝으로 25년 만에 4대문 복원 사업을 완료했다. 총 공사비 44억 원이 투입된 북망문은 2012년 부지매입을 시작으로 2015년 1월에 착공해 2018년 12월 전통 성문 문루(門樓)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 옹성(甕城)과 성벽(71m)을 복원했다. 특히 성문의 형식을 놓고 의견 차이로 1년 6개월 간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었으나 1920년 나주인에 의해 발간한 ‘속수나주지’ 문헌 기록을 통해 성문 형식이 ‘홍예식(虹霓式)’으로 밝혀지면서, 북망문 성문은 곡선 형태의 무지개 모양으로 최종 복원됐다. 4대문 복원 완료에 따라 시는 원도심권 활성화를 위해 역점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뉴딜사업과 읍성권 내 다양한 문화자원과 연계해 독보적인 역사·문화·관광 콘텐츠를 발굴,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강인규 나주시장은 “나주읍성 4대문 복원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준공 등을 통해 나주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고, 더 나아가 나주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남도의 역사적 책무를 실천해가는 앞선 도시가 됐다”며 “역사문화도시 천년고도 나주를 지켜온 ‘나주정신’을 발휘해 나주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호남의 중심도시 나주라는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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