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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민족시인 ‘이육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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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민족시인 ‘이육사문학관’
  • 취재=한기원·백벼리 기자
  • 승인 2021.07.1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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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학관 활성화 방안을 찾다 〈7〉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 전경.  

문학관, 지역 문화예술의 활동 거점·문화향수의 전통적 가치창출 요람
저항시인·민족시인 이육사 기리는 ‘이육사문학관’ 관람객들의 사랑받아
일제강점기 17번 옥살이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
이육사, 대쪽 같은 성품으로 문무 겸비, 말 그대로 ‘행동하는 민족시인’

 

문학의 경우 각 지역에서 벌이는 축제 중 문학축제가 갖는 비중이 상당하다. 주로 그 고장 출신 작가와 시인 등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기리기 위한 문학축제는 향토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가운데 지역 문화예술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작가의 문학적 생애와 작품의 가치를 기리는 일로 가장 결정적인 사업은 작가가 태어났거나 연고가 있는 곳에 기념문학관을 세우는 일이다. 실제로 지방분권시대 문화 인프라 중에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이 지역에 세워지는 지역의 문학관이다. 지역의 문학관은 중앙문화의 집중화 현상을 극복해 고유의 지방 특수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문화적으로 취약한 지역의 문학관일수록 해당 지역의 문화 인프라로 합당한 역할이 기대된다. 이것은 문학관이 지역 문화예술의 활동 거점이며 문화향수의 전통적 가치를 창출하는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문학관에 가야 어느 작가에 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는, 그 문학관만이 보관하고 있는 문학 자료의 소장과 활용이 문학관 기능의 첫째라 할 수 있다. 문학관이 단순히 자료 소장을 넘어 그 공간과 시설이 작가 연구와 문학작품의 연구에 도움이 될뿐더러 문학 향수층에 대한 각종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 어떤 면에서 문학관은 도서관의 자료 열람이나 박물관의 자료 전시기능까지를 겸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관 시설에는 자료의 보존에 적합한 자료보관실과 보존 자료의 효율적 전시와 연구 활용을 위한 학예연구실 등이 구비돼야 한다. 결과적으로 문학관이라는 공간이 지역 문화예술의 구심체 역할을 해야 한다. 지역에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를 비롯해 다른 분야의 모든 예술인들의 창조 활동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학관이라는 공간에서 지역의 예술인들이 창조한 예술작품을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시설과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문학관의 공간과 시설을 이용한 효율적인 운영 방안과 실천이 결국 문학관 운영의 성패를 가름하게 될 것이다.
 

문학관 내부.
문학관 내부.

∎ 수감번호 ‘264’ 저항의 상징·시세계 암시기호
지방자치시대 이후, 최근에는 문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관이 관광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인 원천리 불미골(도산면 백운로 525)에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를 기리는 ‘이육사문학관’이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육사문학관’은 일제강점기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가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에 전시관(971.75㎡), 생활관(497.28㎡), 이육사 생가(90.72㎡)가 지어 졌다.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1904년 태어나서 1944년 조국의 광복을 눈앞에 두고 북경의 차디찬 감방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시와 독립운동이라는 치열한 저항의 길’을 걸어 온 민족시인이다. 첫 수감 당시 수감번호였던 ‘264’는 저항의 상징이자 시세계를 암시하는 기호가 됐다.

이육사문학관 전시실은 크게 세 가지 공간과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1층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의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생애 코너에서는 동선에 따라 그의 삶의 궤적을 돌아볼 수 있고, 문학세계 코너에서는 그의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또한 독립운동 코너에 들어서면 육사가 걸었던 항일운동의 가시밭길을 생생하게 따라갈 수 있다. 대구격문사건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 당시 자료와 모형, 문학작품과 비평문이 게재된 도서들을 통해 독립운동가이자 시인과 논객으로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옥시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과정도 육성증언으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며, 감옥을 재현해 고통스러웠던 수감생활도 느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진과 훈장, 추모 시 등을 전시해 관람객들이 이육사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2층은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시상(詩想)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어 문학관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육사의 흉상을 비롯해 이육사를 그리는 마음과 연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촌마을과 가계도, 유학생활, 대구에서의 활동 등 ‘육사(陸史)의 발자취’로 구성돼 있다. 이육사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 수감생활이 시작되는 장진홍 의거사건, ‘육사’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유와 의미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2층 전시실 끝자락에는 문학카페 ‘노랑나븨’에서는 이육사의 고향마을의 전경을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이육사와 관련된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문학관 건물을 나서면 전원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문학관 주변에는 연못과 분수대, 이육사의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 ‘청포도 샘’과 ‘청포도 밭’, 이육사 동상 등이 조성돼 그의 시 세계를 깊이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이육사의 생가는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만수선에 걸리면서 안동시내로 이전·건립됐다. 이후 빈터로 남았다가 1993년에 흙을 돋은 후 ‘육우당 유허지비’와 ‘청포도 시비’를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문학관 내부 전경.

∎ 1944년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이육사는 조부(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 1925년 귀국 대구에서 문화 활동을 했다. 1926년 중국 베이징 중꾸어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27년 여름 조재만과 동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 때의 수인번호 ‘264(이육사)’를 따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청포도, 절정, 광야 등 40여 편의 시를 남겼다. 1932년 베이징과 난징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 6개월 과정을 마친다.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본 것으러 전해진다. 20여 일 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베이징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육사는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을 하던 친척 이병희 여사가 육사의 마지막을 정확하게 증언해 줬다고 한다.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연락을 듣고 이병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가서 관을 인수하고,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을 치렀다. 유골이 든 상자를 이귀례라는 친구집에 뒀다. 순국 후 9일 지나 1944년 1월 25일에 원창에게 넘겨졌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60년 고향마을의 뒷산으로 이장됐다.

이 땅에는 일제강점기에 재능 있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으나 친일행각의 시비에 휘말려 해방 후 친일파로 지목돼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심지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곤욕까지 치른 문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사람으로 우뚝 서 있는 인물이 이육사가 아닐까. 일제강점기 문인들이 문약(文弱)으로 흐르는 성향이 많았다고 하는데 비해 이육사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문무를 겸비, 말 그대로 ‘행동하는 민족시인’이었다. 민족시인 한용운 선사를 배출한 홍주(홍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시인과 같은 맥락에 섰던 대표적 민족시인이 아닐까.

문학관 앞에 설치된 이육사 동상.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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