湖西의 금강산 덕숭산, 선지종찰 ‘東方第一禪院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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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西의 금강산 덕숭산, 선지종찰 ‘東方第一禪院 수덕사’
  • 취재·글=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6.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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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유산 제안사업〈2〉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수덕사(修德寺) 일주문 편액에 쓰여 있는 문구로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썼다. 수덕사가 불조(佛祖)의 선맥(禪脈)을 면면히 계승,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명성은 한국 근현대 선맥을 이어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경허·만공 선사의 뜻을 받들어 참선의 가풍을 이어가는 선원과 부처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는 강원(講院) 등을 두루 갖춘 면모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德崇山) 자락에 터전을 잡은 수덕사(修德寺)는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충청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내포’라고 꼽았듯이 내포땅에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가야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예산, 홍성, 서산, 태안, 당진 등 열 고을을 ‘내포(內浦)’라 불렀는데, 이 일대를 내포평야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이곳에 충청남도청을 비롯해 충남의 중추적인 행정기관이 옮겨왔고 천년 목사고을 홍주는 충청남도청소재지가 됐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쪽으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 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로 충남지방의 말사 60여 개를 관장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 4대총림의 하나인 ‘德崇叢林(덕숭총림)’이다. 또한 청도 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몇 안 되는 비구니의 도량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수덕사가 자리한 터는 우리나라 불교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즉 서기 383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수한 자리에 절이 세워졌다는 것인데,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당의 도선(道宣)이 편찬한 ‘속고승전(續高僧傳)’을 근거로 지금부터 1400여 전인 백제 위덕왕 떼 세워졌다는 설과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지명법사가 창건했다는 설, 숭제법사가 창건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수덕사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세워지고 지금의 가람배치가 어느 정도 정해진 뒤 조선 중종 23년인 1528년, 영조 27년인 1751년과 46년인 1770년, 순조 3년인 1803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확인됐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됐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만공에 의해 해체, 수리공사가 진행되던 1937년 당시 발견된 ‘묵서명(黙書名)에 의해 1308년에 지어진 건물로 판명됐다. 봉종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1937~19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 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와 ‘수서(隨書)’, 그리고 ‘주서(周書)’에 기록돼 있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해지고 있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修德寺)뿐이다. 

또 전해지는 전설로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해 대중창불사를 해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하게 됐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났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이름을 ‘정혜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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