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명당 터 ‘가야산 남원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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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명당 터 ‘가야산 남원군묘’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07.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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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6〉
예산 덕산 가야산 ‘남원군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의 가야산은 ‘2명의 천자가 나오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풍수 용어로 혈(穴·구멍 혈)을 흔히 명당(明堂)이라 부른다. 가야산의 ‘2대 천자가 나올 명당’에 묻힌 남연군(南延君)은 흥선군의 부친이다. 흥선군은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의 만행과 종친들에게 가하는 위협을 겪으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만인이 만대영화의 터와 2대 천자가 배출될 터를 제안했다고 한다. 흥선군은 ‘2대 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원했고, 명당에 묘를 쓰는 게 단숨에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곳에 가보니 가야사라는 절의 경내였고, 묘를 쓸 곳에는 탑이 서 있었다고 한다.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주지에게 거금을 주고 절을 불태웠다는 설과, 영의정 김좌근에게 뇌물을 주고 묘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예산군에서는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가야산 자락 2명의 천자가 나올 터에 부친의 묘를 이장하고 7년만인 철종 3년(1852)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훗날 고종이다. 이후 손자 순종도 태어나 결국 26대 고종, 27대 순종이 황제가 됐다. 2대에 걸친 황제의 꿈은 이뤘지만, 단점도 있다. 묘 뒤쪽 용맥을 일본인들이 잘라버렸다. 잘라낸 흙으로 저수지 제방을 만든다는 억지 구실을 댔다. 명당으로 들어가는 기운을 단절시켜 묘 후손의 힘을 축소시키려는 술책이었다고 한다.


■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이 터는 1868년 묘를 훼손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고종실록 5권(고종 5년)에 기록된 사건은 “이달 18일 오시에 세 돛을 단 이양선 1척이 행담도에 정박했다. 병졸 100여 명이 관청 건물을 파괴하고 남연군 묘소로 달려갔다. 아전, 군교, 군노와 백성들이 죽기 살기로 맞섰으나 칼과 총을 대적할 수 없었다. 서양 도적들이 묘를 훼손하고, 19일 묘시에 큰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本月十八日午時, 三帆異船一隻, 從西而來, 來泊於洪州 行擔島. …중략… 十九日卯時, 洋賊旋向九萬浦行船, 會合大船, 向西而去)”

고종 5년(1868)에는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est Oppert)가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굴총사건이다. 바로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고종 3년(1866)에 2차에 걸쳐 우리나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오페르트는 고종 5년 4월에 제3차로 한반도 답사를 계획한다.

미국영사관에 근무했던 미국인 모험가 젠킨스(Jenkins)를 자본주로,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Feron)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대동하고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The China)에 60톤의 소증기선 그레타호(The Greta)를 붙여 백인 8명, 말레이인 20명, 한인 천주교도 수 명을 비롯해 약 100명의 청국인을 승무원으로 해 상해를 출항했다. 이들의 항해 목적이 무엇인지는 그들의 최고 간부 이외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젠킨스가 후일 재판소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첫째, 조선왕국과 통상조약 체결을 교섭하자는 것이고 둘째, 조선왕국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지구일주여행을 시키자는 것이며, 셋째 이같이 함으로써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진의와 실제 행동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북독일연방의 국기를 계양하고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1869년 4월 17일 저녁에 충청도 홍주의 행담도(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정박했다. 그들은 행담도에서 소증기선 크레타호에 옮겨 타고 삽교천 상류로 항해, 다음날인 18일 오전 11시경 구만포구(현 예산군 고덕면)에 상륙했다. 구만포구에 내린 일행은 동행한 최일선이 이미 덕산군의 천주교도 김여강 등 8명과 접선해 일행을 인도했다. 그들은 러시아군대라고 말하면서 덕산읍내를 통과할 무렵 덕산군수 이종신과 부하들의 제지를 받았으나 큰 충돌 없이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의 남연군묘로 향했다.

그들은 자칭 러시아군이라 소리치며 덕산군아를 습격한 다음 오후 5시 목적지인 남연군묘에 도착했다. 그들은 쇼벨 4자루와 곡괭이로 남연군묘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덕산군수 이종신과 묘지기와 몇 명의 주민들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무장한 서양인들의 위협과 행패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파묘 작업은 쉽지 않아 마을에서 곡괭이와 지렛대 등을 구해 관곽을 파괴하는 작업을 했으나 5시간이 경과해도 퇴토의 일부를 떼 내는 정도였다. 즉 4월 18일 밤 10시 30분경이었고 그들은 다음날 새벽 1시가 지나서 관곽의 석고벽까지 파들어 갔으나 관곽의 벽이 워낙 견고해 예정시간보다 12시간이 경과한 상태에서 중단하고 말았다. 

날은 밝아오고 구만포구에 정박시켜 둔 그레타호가 썰물이 되면 도주할 수 없으므로 지체 없이 철수했다. 본래 경기도 연천군에 있던 남연군묘를 이곳에 이장할 때 거액을 들여 암반을 파서 관을 안치하고 무려 300포의 생석회에 흙을 섞어 물과 혼합해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도굴단은 4월 19일 오전 6시 구만포구로 다시 돌아와 그레타호를 타고 삽교천을 이용, 차이나호가 정박해 있는 행담도로 향했다. 그들은 퇴로에도 서슴지 않고 만행을 감행해 하리후포에서는 민가를 습격 약탈을 자행했다. 하리후포는 지금의 당진시 우강면 부장리 하리마을로 추정된다.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하리마을은 삽교천 수로가 강폭이 좁아 도굴단은 썰물 때 삽교천 하류방향으로 퇴각하면서 무모하게 민가에 침입해 약탈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오페르트가 저지른 도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젠킨스는 미국인에게 고발당하고, 페롱은 본국으로 송환됐다.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 한 사실을 알게 된 흥선군은 이후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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