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째 100년 가업을 이으며 1000년의 소리 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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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100년 가업을 이으며 1000년의 소리 재현하다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2.08.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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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다, 100년 가업을 잇는 사람들 〈8〉
전북 정읍 샘고을시장에 있는 4대째 정읍장구의 명맥을 잇고 있는 ‘전승명가’.

전북 정읍, 108년 전통 샘고을시장에 100년 전통 잇는 국악기 명장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서인석 명장이 만드는 통장구의 깊은 울림 철학
100년 전통 국악기기술 ‘정읍장구’ 명맥 4대째 가업 잇는 ‘전승명가’ 
서 명장, 1000년 전 목이 없는 고려청자로 만든 장구 소리를 재현해

 

옛날 남도에서, 고창에서, 부안에서, 순창에서, 광주에서도 일단 한양을 가려면 정읍(井邑)을 거쳐야만 했다. 호남의 교통 요충지로 근대에 들어서도 철도가 들어서면서 정읍을 중심으로 한 인근 도시들은 정읍을 거치지 않고서는 서울이나 대전, 목포, 부산 등 인근 도시를 갈 수가 없었기에 지역적으로 가치가 또렷한 도시다. 현대에 와서도 정읍은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사통팔달의 원활한 교통으로 인한 물류의 중심 도시이고, 공업은 물론 농업과 관광까지 골고루 기반을 갖추고 안정적 발전을 지향하는 도시로 꼽힌다. 특히 농민이 중심이 돼 125년 전 갑오동학혁명을 일으킨 발상지도 바로 정읍이다. 

내장산의 수려한 풍광으로부터 호남평야라는 청정한 곡창에 이르기까지, 정읍사라는 백제시대의 유일한 한글 가요에서 최초의 가사 상춘곡까지, 수제천이라고 하는 궁중음악에서 전국 제일의 우도농악에 이르기까지, 마한시대 청동기 문화에서부터 혁명을 통해 부패한 봉건체제를 바꾸려 했던 근대 동학농민혁명까지 역사와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정읍이야말로 한국 역사의 축소판이자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이런 샘고을 정읍(井邑)은 동쪽으로는 우뚝 솟은 내장산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 100년 전통의 국악기 제조명가 ‘전승명가’
전북 정읍에는 108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샘고을시장이 있다. 지난 1914년,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이 시장은 축구장 5개를 합친 면적에 시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13개나 되는 큰 전통시장이다. 300개가 넘는 점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시장 골목골목마다 활기가 넘친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시장답게 훈훈한 인심은 덤이다. 시장의 역사와 함께 잊혀져 가는 전통을 꿋꿋이 이어가는 가게들이 역사를 만들고 있다. 특히 50여 년 역사를 가지고 샘고을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하고 있는 재래식 솜틀집, 목화솜 이불이 혼수품 목록 1호였던 시절, 한창때는 종업원도 두고 솜틀기가 무려 3대나 될 만큼 번성했단다. 지금은 보기 힘든 오래된 나무 솜틀 안에서 흰 솜이 틀어져 나와 이불이 되기까지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드는 모든 공정을 볼 수 있는 진풍경이 펼쳐져 정읍 기네스에도 올라 있다고 한다.

샘고을시장에는 또한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국악기 제조기술을 4대째 이어가는 곳도 있다. 집안 대대로 장구와 북 등 전통 국악기를 만드는 ‘전승명가’가 그곳이다. 지난 2015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아 악기장의 칭호를 얻은 서인석 명장이 만드는 장고(杖鼓; 장구의 원래 말)는 다른 지역 국악기보다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 비밀은 순전히 장구통에 숨어 있다는 설명이다. 보통 장구가 3토막에서 5토막의 나무 조각을 깎아 붙인 뒤 통을 연결하는데, 서인석 명장의 장구는 하나의 나무를 토막 내지 않고 통째로 깎아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구는 통장구라고 해서 울림이 크고,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먼 곳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유다. 특히 서 명장은 장구의 재료로 쓰이는 오동나무를 최소한 50년에서 100년 이상 된 것만 고집한다는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명장의 고집과 철학이 명품 장구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예로부터 인근 100리 안 시장들의 중심이 돼 정읍 일원은 물론 이웃의 고창, 부안, 순창, 전남 일부 지역에서도 찾아들었던 정읍 샘고을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뿐만 아니라 오랜 전통을 잇는 굵은 역사와 흥미진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전승명가의 장구.

■ ‘정읍장구’ 명맥 4대째 100년 가업 잇다
전북 정읍 샘고을시장에는 장구와 북을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은 국악기 판매점인 동시에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2호 서인석 악기장’의 작업장이기도 하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전승명가’라는 10평 남짓한 가게에는 50여 종의 장구와 북이 빼곡하게 쌓여 있다. 대금과 피리, 퉁소, 가야금은 물론 농악놀이에 필요한 상모와 고깔 등 150여 종의 악기와 소품, 풍물제품 등 수천 점의 국악기와 액세서리 북과 장구부터 어른 몸통만 한 장구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장구 제작은 오동나무를 선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30년 이상 된 나무를 가져와 적당한 크기로 잘라 2~3년 동안 그늘에서 말린다. 잘 건조된 오동나무를 수천 번의 망치질과 수만 번의 대패질로 파고 깎아서 장구 모양을 만든다. 이 작업은 최소 6개월, 길게는 2~3년이 걸린다고 한다. 기계를 이용해 만든 장구는 나무를 가로로 깎아 세 토막에서 다섯 토막으로 조립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전승명가 장구 몸통은 하나의 통나무를 깎아 만든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라는 설명이다. 수작업 장구는 나뭇결에 따라 세로로 깎아서 만드는데, 깊게 깎아 만든 장구통이 ‘정읍 장구’의 특징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 통으로 만든 ‘전승명가의 장구’는 울림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 특징적이다. 

샘고을시장 장터 안에 자리 잡은 가게에서도 제작 작업은 하지만 오동나무를 다듬는 거친 작업은 이곳에서 3㎞ 정도 떨어진 ‘재인청’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정읍 상평동 칠정마을에 자리 잡은 공간으로, 전승명가의 악기 제조공장이다. 악기 제작에 필요한 오동나무와 소가죽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밖에서 볼 수 있고, 작업장으로 들면 서 악기장의 조부가 사용하던 대패와 끌, 톱 등 도구가 정리돼 있다. 이곳은 장구만 만드는 작업장에 그치지 않는데, 전수나 후학 양성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100㎡ 남짓한 작업장에는 조부가 제작한 장구 모형부터 현재 학생들이 만든 장구와 북 등이 전시돼 있다. 또 매년 전국에서 모여든 호남 우도농악과 악기 제조법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 숙식을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전수생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객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일주일가량 머물면서 농악과 풍물을 배우고 직접 악기를 제작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서인석 명장이 보유한 고려청자장고.

100년 전통의 ‘전승명가’ 국악기 제조기술은 제1대 서영관(1884~1973) 명장으로부터 시작했다. 정읍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마을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던 그는 손재주가 좋은 소목장으로 각종 건축은 물론 악기 제작과 풍물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정읍농악을 이끌면서 장구와 북 등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2대 서남규(1925~2005) 명장은 선대에서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상업화에 나섰다. 1970년에 당시 제일시장(샘고을시장)에 터를 잡고 악기 제작과 기술 개발, 악기 보급에 힘썼다. 덕분에 정읍 장구는 전국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한때 큰 부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군부독재 정권이 장기화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1980년대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40~50명이 한데 어울리는 농악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꺼린 정권 영향으로 농악놀이가 사라지고 4명이 하는 사물놀이가 번성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산업화로 이농이 심화하면서 농악단이 급감했고, 장구와 북 등 국악기 판매도 줄었다. 여기에 1990년대 들어선 중국산 장구 등이 수입되면서 국악기 제조업체는 거의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이제 서인석 명장의 장남(창호)이 4대째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면서 ‘정읍장구’의 명맥을 부친과 함께 계속해서 잇고 있다.

서 명장은 요즘 1000여 년 전 고려시대 만들어진 장구를 보며 당시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려청자로 만든 장구는 중간에 목이 없다. 장구 중간에 둥근 띠 모양의 목이 있으면 장구 소리가 멀리 가지 못하고 웅웅거리지만 목이 없으면 궁채(왼쪽)에서 열채(오른쪽)로 소리가 이어져 울림이 깊고 큰 장구 소리를 낼 수 있다고 설명하는 서인석 장구 명장이 목이 없는 장구를 만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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