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여 세월 6대째 ‘옹기장’ 가업 잇는 갈산 ‘성촌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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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여 세월 6대째 ‘옹기장’ 가업 잇는 갈산 ‘성촌토기’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2.10.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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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다, 100년 가업을 잇는 사람들 〈10〉
100년 세월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홍성 갈산면 동성리 성촌마을의 성촌토기 앞마당에 진열돼 있는 전통옹기.
100년 세월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홍성 갈산면 동성리 성촌마을의 성촌토기 앞마당에 진열돼 있는 전통옹기.

옹기, 한민족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 발효음식·곡물 등 저장용기로 사용
가마에서 구워질 때 질(점토)이 녹으면서 미세한 구멍 형성 숨을 쉬게 돼
홍성 갈산 성촌토기, 조대불통가마와 잿물방식의 전통 옹기를 만들어 와
전통옹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고집스럽게 천연재료로 유약을 만드는 이유

 

요즘엔 옹기를 쓰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가볍고 편리하다는 스테인리스나 플라스틱 합성수지제품 등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연재료를 사용해 만든 옹기는 들숨, 날숨을 자유롭게 쉬는 그릇이라 근본부터 다르다고 한다. 옹기 조각에 손을 베어도 덧나는 법이 없다고 전하는 이러한 전통옹기 제작기술이 전수돼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곳이 바로 홍성군 갈산면동성리 성촌마을에 있다. 갈산면 동성리마을은 뱃길로 통하는 교통망과 땔감으로 쓸 목재가 풍부한 옹기생산의 적지로 과거에는 여러 옹기공방에서 생산된 옹기가 뱃길을 통해 타 지역으로 보급되기도 했던 지역이다. 특히 홍성지역은 새조개와 광천토굴새우젓 등 각종 젓갈로도 유명한 곳인데, 이러한 해산물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용기가 옹기(甕器)다.

옹기는 한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로 주로 발효음식이나 곡물 등의 저장용기로 사용돼왔다. 된장, 김치 등 발효음식은 냄새가 심해 냉장고나 보관 용기에 냄새가 배는 경우도 있고 쉽게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옹기에 보존한 발효음식은 쉽게 변하지도 않고 냄새 또한 막아주는 이유는 옹기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 옹기는 고운 흙으로 만든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작은 알갱이가 섞여 있는 질(점토)로 만들어지는데, 가마 안에서 구워질 때 질(점토)이 녹으면서 미세한 구멍이 형성된다. 이 구멍으로 공기·미생물·효모 등이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가마 안에서 구워지면서 발생하는 검은 연기가 그릇 내·외부에 침투해 방부제 역할을 한다. 특히 세균이 옹기에 서식할 수 없어 위생상으로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통상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으로 구분된다. 질그릇은 질(점토)만으로 반죽해 나무를 많이 넣은 뒤 아궁이와 굴뚝을 막아 구운 것으로 숨도 많이 쉬고 습도 조절능력도 뛰어나지만 표면이 거칠다. 오지그릇은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서 오짓물(잿물)을 입혀 굽기 때문에 표면이 매끄럽고 윤기가 있다. 실제로 “우리 살림의 반은 옹기”라고 할 정도로 다양하게 옹기가 쓰이고 있다.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우리의 전통 식품을 발효할 때 옹기는 가장 효과 높은 용기다. 진흙을 섭씨 1200도로 구워서 만드는 옹기는 자기와 달리 안팎의 공기가 서로 통하면서 발효가 잘된다. 이를 우리는 이른바 ‘숨 쉬는 옹기’라고 한다. 또한 옹기에 담은 물은 잘 변하지 않으며, 옹기에 보관한 쌀에는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이 밖에도 촛대, 재떨이, 담배보관함, 요강, 약탕기, 벼루, 식기, 제기(祭器), 땅에 묻는 토관, 연통 등 옹기로 만든 종류가 다양하고 많았다. 

근대화 이후 질그릇은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오지그릇은 일제강점기부터 번거로운 잿물대신 사용이 수월한 ‘광명단(납을 산화해 만든 화공약품)’이나 망간을 사용하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지만, 1977년에 발생한 일명 ‘광명단 사건’으로 옹기업계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한때 겉만 번드르르한 광명단 옹기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일정기간 유행하기도 했지만 음식을 보관하는 그릇에 조금의 납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으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광명단을 사용한 옹기는 김치나 간장을 오래 저장하면 맛이 변하고, 또 산이나 열에 약해 불에 올리거나 김치와 같은 발효식품을 담아두면 납 성분이 녹아 몸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유행에 그치기도 했던 것이 ‘광명단 옹기’였다.
 

■ 전통옹기 만들기의 역사와 내력
옹기는 상고시대 때부터 관용제기(官用祭器) 식기·솥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돼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와기전(瓦器典)이라 해 도기류(陶器類)의 생산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경덕왕 때 잠시 도등국(陶登局)으로 고친 일이 있으며, 소속관원으로는 간(干) 1인과 사(史) 6인을 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 공전(工典) 경공장조(京工匠條)에 보면 공장의 직종 중 사기장(沙器匠)이 가장 많은 386인으로 사옹원(司饔院) 소속에 380인, 내수사(內需司)에 6인이 종사했는데, 옹장은 본조(本曹) 봉상시(奉常寺) 등 14개 기관에 104인이 종사했으며 각도·각읍에 공장의 명색이 있으나 18세기의 ‘대전통편(大典通編)’ 공전(工典)에는 외공장의 성적(成籍)을 각도에 비장(備藏)하는 법규가 없어지고 관부에 사역이 있으면 사공(私工)을 임용하도록 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 초계군(草係郡)과 진주목(晋州牧)에 황옹(黃甕)만을 굽는 가마가 세 군데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경국대전’ 공전 외공장조에는 충청도 임주(林州)에 황옹장 1인이 있다고 했다. 옹기점의 시설로는 수비장(질 좋은 흙을 얻기 위한 시설), 움(작업장), 물레(그릇제작용 받침틀), 송침(건조시설), 찬간(저장시설), 가마(그릇 굽는 시설) 등이 있으며 가마의 형태는 경사진 곳에 길게 비스듬히 축조한 등요가 일반적이다. 

전통옹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진흙, 약토(소나무가 많은 구릉에 나뭇잎, 풀뿌리 등이 오래 동안 쌓여서 썩은 흙), 하얀 흙, 땔나무, 잿물 등이다. 이전에는 옹기를 만드는 곳 주변의 언덕, 논, 밭 등지에서 진흙을 채취했다. 그러나 차츰 좋은 흙이 없어지게 되고, 1950년대 이후부터는 멀리서 흙을 파 와 큰 구덩이에 넣고 물을 섞어 고운 진흙을 얻었다. 옹기를 만드는 곳인 옹기점은 작업장, 건조장, 수비장(진흙을 개는 곳), 잿물 보관소, 가마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전에는 보통 장인 2명과 보조자 2~3명이 있었으나 지금은 장인 혼자 일하는 곳이 많다. 드물게는 현대식 공장 규모를 갖춘 곳도 있다. 옹기를 만드는 방법은 먼저 물레의 판 위에 흰 흙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진흙으로 바닥에 펴서 판을 만든다. 물레판에 흰 흙가루를 뿌리는 것은 옹기의 모양 완성 후 물레에서 뗄 때 옹기가 눌어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옹기의 바닥을 만들고 나서 그 위에 진흙가래(또는 진흙판)를 말아 올려서 쌓아가며 모양을 완성 시킨다. 크기가 큰 옹기는 두 명이 천을 이용해 그늘로 옮겨서 말린다. 옹기가 마르면 옹기에 유약을 묻히고 다시 건조 시킨 후 가마 안에 넣고 불을 땐다. 보통 사흘 정도 장작불을 때며, 장인과 보조자가 교대로 밤을 새워 가며 일한다. 굽는 것이 끝나면 이틀 정도 가마를 식히고 나서 옹기를 꺼낸다. 

우리나라의 옹기장에는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지역이 이러했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정부의 가톨릭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자 가운데 옹기장으로 변신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가톨릭 신자 옹기장들은 가마에 쓸 나무를 손쉽게 구하기 위해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가 지냈으며, 옹기를 각 지역에 팔면서 포교 활동을 하거나 신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지난 2006년 100대 민족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옹기를 선정하고, 현재 전통 기술을 보유한 옹기장을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성촌토기 전경.

■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숨쉬는 무공해 옹기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던 방식 그대로, 지금까지 백여 년을 넘어 이어오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성촌토기에서 제작한 옹기입니다.” 

손자까지 6대째 100년여 세월동안 가업을 잇고 있는 곳이 갈산면 동성리 성촌토기마을의 ‘성촌토기(대표 이완수(88) 옹기장)’다. 이 대표의 부친인 3대 옹기장 이종각 옹은 지난 1990년 5월 8일 무형문화재 96호로 등재됐다. 이종각 옹이 작고하자 장남인 이완수 대표가 전수자로 4대째 대물림했다. 홍성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100여년 6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곳이다.
성촌토기의 내력은 1920~1930년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표의 증조부 고 이경욱옹으로부터 시작된 옹기 인생은 조부 고 이우증 옹이 2대를 잇고, 지난 1993년 12월 82세로 타계한 무형문화재 96호인 부친 고 이종각 옹이 3대째 가업을 물려받았다. 이종각 옹은 선친의 뜻에 따라 이곳에서 조대불통가마와 잿물방식으로 옹기를 만들어왔다.

조대불통가마는 이 옹이 남겨 놓은 유일한 ‘T’자형 모양의 조선시대 통가마이다. ‘T’자형 통가마는 충청도지방과 전라도 접경지역에 산재해 있었는데 지금은 ‘성촌토기’에만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가마다. 전국 각처의 가마들과는 다른 구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이종각 옹은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받았는데, 이 옹이 타계한 이후에는 큰아들인 이완수 대표가 4대 장인으로서 가업을 물려받았고, 이제는 몸이 불편해 이완수 대표의 아들인 이상태 씨가 5대째 장인의 길을 잇고 있다. 또 상태 씨의 아들인 손자 찬열 씨가 6대째 장인의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기도 했으며,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오늘도 가마를 지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성촌토기의 특징은 유약에 있다. 일명 ‘잿물작업’이라고도 설명한다. 성촌토기 옹기의 특징은 화공약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대로 잿물에 담갔다 굽는 재래식 방식 그대로 옹기를 제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이종각 옹에 대해 ‘이 옹은 전주이씨 영흥대군파 16대 손이다. 1915년 충남 홍성군 갈산면 동성리 110-5번지에서 아버지 우증과 어머니 순매 사이에 3형제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이 옹은 평소 검소하며 무엇이든 집념하는 성격으로 가업인 전통 옹기장이의 맥을 이으라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오직 조대불통가마와 전통잿물방식만으로 항아리 만들기에 전념하였다.

이 옹은 광복후 일본에서 개발된 광명단 유약을 쓰지 않고 잿물방식에 소나무만을 지피는 전통옹기 만들기를 고집하였다. 산업화에 따라 플라스틱, 유리, 스테인레스에 밀려 전통옹기를 외면하는 어려운 여건속에서 아무도 인정해주는 이 없는 가마터를 울분을 참고 지키면서 장남 완수와 사남 진수에게 옹기장이의 기법을 전수하여 전통 맥을 잇도록 하였으며 손자 상태도 가업을 이어받아 신기법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한평생을 오직 전통옹기 만들기에 전념한 결과 1990년 5월 8일 정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그 후에도 연로한 몸으로 작업실에서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다가 1993년 12월 2일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촌토기 전시관의 각종 옹기.

전통옹기는 김치를 비롯해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술, 식초 등의 식품을 발효시키고 저장하는 용기다. 당연히 친환경적이어야 한다. 화학약품을 써서 바를 경우 인체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통옹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고집스럽게 천연재료로 유약을 만드는 이유다. 성촌토기 역시 밭에서 나는 부드러운 흙과 콩 부산물 등을 태운 재를 배합, 숙성시킨 후에 물에 풀어 앙금을 만들어 유약으로 사용한다. 장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만약 화공약을 사용하게 되면 가마에서 900도가 넘었을 때, 약 처리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온도를 높여 구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화공약품을 사용한 옹기가 깨진 조각을 보면 덜 익어 흙 색깔이 붉은 빛이다. 그렇게 흙이 덜 익은 항아리에 음식을 보관하면 냄새가 나고 썩거나, 심지어는 곰팡이가 피기도 한다. 그러나 흙의 염도를 맞추고 1200도까지 온도를 올려 굽기 때문에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옹기가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성촌토기의 옹기들은 다른 항아리보다 두께가 훨씬 두껍지만, 깨진 조각을 살펴보면 높은 온도에 잘 구워져 잿빛인 반면, 다른 옹기들은 얇으면서도 잘 구워지지 않아 붉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옹기를 빚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가마에서 굽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재래식 가마의 경우 3일간 불을 때고, 2~3일간 식히는 과정을 거치는 등 일주일을 꼬박 지켜야 제대로 된 옹기가 만들어진다. 또, 불이 꺼져서 바람이 들어가거나 온도가 급격히 변하면 옹기에 금이 가거나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불을 때는 동안에는 가마 앞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 정도로 온 신경을 불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처럼 가마에서 구워지는데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재래식 가마로는 1년에 10번 정도 구우면 잘 구웠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2대의 기계식 가마가 도입돼 훨씬 수월하게 작업을 하고 있다. 비록 재래식 가마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대를 이어온 재래식 가마를 보존하며 전통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지금은 손자까지 100여 년 세월 동안 6대째 옹기장의 장인정신을 계승하며 가업을 잇겠다고 나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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