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과 홍주의사총, 충청·홍주의병의 상징이고 구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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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과 홍주의사총, 충청·홍주의병의 상징이고 구심체
  • 글·자료|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2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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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1〉

어찌해서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땅이었을까. 국토(國土)가 유구한 민족사(民族史)의 요람이라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홍주(洪州) 땅만이 독존(獨存)은 아니었을 텐데, 많은 국토의 편린(片鱗) 중에서 어떻게 해서 홍주(洪州)가 의병(義兵)의 발상지(發祥地)가 됐을까.

충청도를 시발로 일어난 의병투쟁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 전면적인 전쟁상태를 선포하게끔 하면서 우리의 민족사를 살아 있게 했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무력항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민족저항사의 원류가 되게 한 것도 의병(義兵)이다. 의병은 국권이 강탈당한 이후에도 간도나 연해주로 옮겨가 항일투쟁을 벌이는 독립군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이는 1940년 중경의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 때 발표한 ‘한국 광복군총사령부 설립보고서’에서 ‘의병이 바로 광복군의 시초’라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1918년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의군부의 ‘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서도 ‘의병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3·1운동의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의병정신을 통해 독립투쟁사나 민중저항사의 시원지가 충청의병, 즉 홍주의병(洪州義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사상적 의의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의병(義兵)운동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으나 의병운동의 성격이 다양하고 특정 의병장에 대한 것에 머물고 있어 의병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실정이다. 민족주의 시각에서 의병운동을 바라보자면 의병운동이 민족운동이라면 그의 중심개념이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며, 특히 의진의 성립과 의진의 주체, 그들의 이념과 민족주의상의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보편적으로 의병의 구분은 을미의병(乙未義兵),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1894년부터 1915년까지 20년간의 의병전쟁사를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제1기는 일제의 반식민지적 침략과 의병전쟁의 발단이며,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전후로 한 단계로 나눈다. 제2기는 일제의 준식민지적 강요와 의병전쟁의 발전이며,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로 인한 의병의 봉기와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의 의병봉기의 단계로 구분한다. 제3기는 정미조약과 국민적 전쟁의 시기이며, 1908년 5월에 있었던 서울 탈환 작전을 계기로 한 전후로 나눈다. 제4기는 의병전쟁과 독립군 편성의 시기이며,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한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민족주의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편리한 방법일 수가 있다는 관점에서 의병봉기의 계기에 기준을 두기 때문이며,특히 기존의 3분법으로는 을미의병에 앞서 갑오년에 의병이 기병한 사실이나 을사조약 이전에 기병한 내용들을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이 의병운동을 단계적으로 분석하고 그 단계와 단계적 변천이 민족주의와 어떠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의병사를 체계화하는데 있어 필요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한국사적 개념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한국적 특질부터 따져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자발적으로 국가·민족 위해 싸운 민군
민족이란 생활공동체이면서 문화공동체라는 점에서 혈연에 의한 분류인 종족과 다르고, 또 단순히 국가 소속원인 국민과도 다르다. 민족 구성원의 자각의식을 ‘민족의식’이라 하고, 그 민족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행동 논리 또는 행동철학을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전적 민족주의와 근대적 민족주의로 나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삼국통일을 종족의 통일이 아닌 민족통일로 파악했고,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올렸으며, 민족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는 등의 모습이 분명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의식이 조선 중기에 심화된 성리학의 보편주의적 지배가 강화되면서 봉쇄당해 민족의식이 확산되지 못하고 침체하고 말았다. 근대민족주의는 시민민족주의에 의해서 제고되기 시작하는 것이 세계사적으로 공통되는데, 우리의 경우도 조선 후기 실학 때에 시민민족주의가 태동해 그 이전의 고전적 민족주의가 근대민족주의로 대체돼 가기 시작했다. 근대민족주의가 고전적 민족주의와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은 민족의 동질적 발전 즉, 민족의 구성이나 성장에 계급을 부정하는 논리가 전제된 점이고, 이러한 인간의식은 대내적 동질의식인 동시에 인류의 평등이념으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에 관한 역사서술은 한말의 개화사상이나 개화운동에 밀려 낮게 평가돼온 측면이 강하다. 이처럼 개화 위주의 근대화 서술은 식민지화를 호도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된 제국주의 이론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역사해석에서 비롯돼 왔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무장항쟁을 한 민병(民兵)으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봉기했던 국가의 정수(精髓)가 의병정신(義兵精神)의 계승(繼承)이다.

의병(義兵)이라는 개념은 신분과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결국은 일반 백성, 평민들이 모인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 다시 말해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운 민중의 의용군(義勇軍)이다. 우리 민중은 아득한 옛날부터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용감히 일어나 싸웠고, 이러한 전통 가운데 뿌리를 내리는 중심이며, 국가의 정수(精髓)가 바로 의병(義兵)이며, 의병정신(義兵精神)인 것이다.

이러한 의병항쟁(義兵抗爭)이 가장 많았고 혁혁한 업적을 남긴 곳, 최초의 의병이 궐기한 곳이 충청도(忠淸道)이며, 충청도 중에서도 홍주(洪州) 땅 이었다. 한 지역에서 세 번의 창의(倡義)가 있었던 곳도 이곳 홍주(洪州) 땅이라 ‘충절의 고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홍주(洪州) 땅에서 창의(倡義)가 있었고, 그 중심지가 바로 홍주성(洪州城)이며, 홍주성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명에 달하는 의병들의 넋은 현재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에 잠들어 있다. 홍주의사총은 홍주의병(洪州義兵)의 유골이 묻힌 성지(聖地)이다. 의병전쟁 사상 단일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냈으며, 이후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됐다. 전국적으로 의병과 관련된 유적지는 산재해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하는 의병의 유해가 집단적으로 매장돼 있는 곳은 전국에서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결과적으로 홍주성(洪州城)과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은 충청의병(忠淸義兵), 다시 말해 홍주의병(洪州義兵)의 중심지이며, 상징이고 구심체가 된 핵심이다. 홍주의병(洪州義兵)은 1910년대 독립전쟁과 3·1독립운동으로 이어지며, 인적·사상적으로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홍주성 홍주아문.
홍주성 남문인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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