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전국 의병봉기 도화선·독립전쟁·3·1운동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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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전국 의병봉기 도화선·독립전쟁·3·1운동 이어져
  • 글·자료|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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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2〉
홍주의병 전투도.

한말 최초의 의병항쟁, 1896년 1월 시작해 9~10월까지 계속돼
‘민비시해사건’인 을미사변과 갑오변란, 단발령이 결정적 발단
충청도 홍주, 김복한과 이설 등 유생 을미사변 직후 기병 계획
홍주의병, 홍주관아에 창의소 설치,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

 

한말 최초의 의병항쟁은 1896년 1월에 시작해 9~10월까지 계속됐다. ‘을미의병(乙未義兵)’이라 부르는 봉기는 1895년 8월 20일에 일어난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인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갑오변란(甲午變亂·更張)이 결정적 발단이 돼 일어났다. 1895년 11월 15일에 단행된 ‘단발령(斷髮令)’도 중요한 계기가 됐다.

홍주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 홍건(洪楗) 등의 전직 고위 관료들이 중심이 돼 지방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895년 12월 3일 홍주의병(洪州義兵)은 홍주관아(洪州官衙)에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김복한(金福漢)을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복한(金福漢)은 홍주부(洪州府) 관할 22개 군과 홍주(洪州) 군내 27개 면에 통문(通文)을 띄워 의병에 참여를 독려했으며 각 고을 대표들은 집을 방문해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하고 각호에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한 다음 날인 12월 4일 홍주관찰사(洪州觀察使) 이승우(李勝宇)가 배반하고 말았다.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민병세력들은 이승우(李勝宇)를 만나 의리정신(義理情神)을 강조하며 여러 차례 뜻을 함께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이승우는 지역 유생들의 권유와 협박에 마지못해 참여 의사를 밝혔을 뿐 실패를 두려워했다. 이승우의 배반으로 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홍건, 이상린(李相麟), 송병직(宋秉稷), 안병찬(安炳瓚) 등 지도부 23명이 체포돼 서울로 이송됐으며 한성재판소로부터 김복한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에 처해 졌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전원 석방됐다. 이렇게 1차 홍주의병은 끝이 났다.

2차 홍주의병은 이로부터 10년 뒤인 1906년 일어났다. 1895년 1차 홍주의병을 일으켜 세웠던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이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을미사변 후 관직을 떠나 은거하던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봉기했다. 2차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15일 지금의 예산 광시면 광시장터에서 첫 발기를 했고 홍주성(洪州城)으로 향했다. 하지만 관군의 저항에 홍주성 함락은 쉽지 않았고 전열을 재정비해 의병을 일으킨 지 두 달 뒤인 5월 19일 홍주 에 진입한다. 의병들은 홍주로 오는 길목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얻은 구식화포 2문을 앞세워 홍주성 공략을 시작했다.

거센 공격에 홍주성을 지키던 일본 헌병들은 동문을 통해 덕산 방면으로 도주, 공략 하루가 지난 20일 아침 홍주성을 점령했다. 홍주성 점령 직후 민종식은 징병을 통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의병들에 의해 쫓겨난 일본군은 공주에 있던 병력을 지원받아 다시 홍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의병부대가 이를 물리치고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에 일본군은 포병과 기병, 헌병과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병해 경찰과 헌병들이 합세, 홍주성을 탈환할 것을 지시한다. 같은 달 30일 일본군은 막대한 전력으로 홍주성을 둘러싸고 31일 오전 2시 30분 기마병의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키고 의병 제압에 나섰다. 기관총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동문이 폭발된 지 1시간 30분만에 홍주성을 점거 끝내 의병을 제압했다.

2차 홍주의병은 양민을 포함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단일 전투로는 전국 최대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2차 홍주의병은 전국 곳곳에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됐으며, 1910년대 독립전쟁과 3·1독립만세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당시 홍주성(洪州城)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명에 달하는 의병들의 넋은 현재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에 잠들어 있다.
 

명성황후(1851~1895)의 시해 현장인 경복궁 건청궁의 구한말 때 사진.

■ 을미사변·단발령, 의병봉기 움직임 뚜렷
을미사변은 개항 이래 일제 침략을 증오하던 조선인의 항일의식을 격앙시키고 말았다. 더구나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해 오던 전국의 유생과 전직 관려들은 이때야말로 일제를 몰아내야 하는 중요한 시기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을 당한 친일정부는 일제에 휘말려 우리 백성들이나 유생들의 동향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봉에 급급해 사후처릴 그르쳤다.
주동자와 하수인들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공사 이하 일본 낭인(浪人)들의 죄는 묻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민비(閔妃)를 죄인으로 만들어 폐위시키는 조칙(詔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유생들의 분노와 항소항쟁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계속된 항소항쟁에는 이건창에 이어 최익현·이남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폐위를 반대함은 물론 일본의 침략세력을 토벌해 원수를 갚을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일본군을 배경으로 한 일제의 세력이 정부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항소항쟁만도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이니 유생들의 서릿발 같은 의리(義理)와 기개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일환으로 단행된 단발령(斷髮令)도 을미사변(乙未事變) 못지않게 백성들을 격분시켰고, 특히 위정척사론(爲政斥邪論)을 바탕으로 한 수구적 사상을 견지한 유생들의 공격목표가 됐다. 이들 전국의 유생들은 갑오경장의 모는 것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을 추진하기 위해 1895년 6월 21일에 오토리(大鳥圭介)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궁궐에 침입한 사건을 질시했던 까닭에 단발령에 이르면 위국사신(爲國捨身)과 창의복수(倡義復讎)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에 의하면 단발령(斷髮令)은 당시의 현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강제령이었다. 단발령(斷髮令)이란 것이 왕은 물론 정부 대신들의 의사라기보다는 일제의 사전 계획에 의해 우선 궁궐침범을 위협하고, 강제하에 급진적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정부는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건춘문사건(建春文事件)의 미흡한 처리와 함께 단발령까지 시행, 유생과 백성들을 급기야는 의병항쟁(義兵抗爭)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점을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저서 ‘한국통사(韓國通史)’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국모가 시해를 당했는데 아직 토벌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국민이 무력은 없다 하지만 격노하고 노하여 팔을 걷고 이를 가는 것은 타고난 천품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비분강개하는 사람 중에는 성패나 생사를 생각지 않고 복수하는 의리를 천하에 알려 주려고 하는 일인들 없을 것이냐. 이러한 점으로 뽈 때 그 위험한 기미가 강하의 물을 막는 것처럼 반드시 터지고야 말 것이 의심 없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에 입에서는 정부의 개혁이니 개화니 하는 것이 국민들이 처음 보고 갑자기 듣는 것이기 때문에 대개는 복종하는 마음이 없으며, 정령(政令)이 발표될 때마다 이르기를 ‘왜인의 행정’이라 하고 지방관리를 보면 말하기를 ‘왜관찰사(倭觀察使)’니, ‘왜군수(倭郡守)’라고 하며, 내각의 여러 신하를 가리켜서도 역시 그러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대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1895년 6월 21일 일어난 일본군의 궁궐침입사건(宮闕侵入事件)으로부터 11월 15일 단발령(斷髮令) 시행에 이르는 사이에도 이미 구체적으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할 움직임이 뚜렷했다. 창의소(倡義所) 고시문(告示文)이 민비의 폐위 조칙이 발표되던 날 서울에 나붙었으니, 민비 시해 이들만인 8월 22일 이었다.
 

■ 홍주성, 창의(倡義)의 함성으로 충천
충청도 홍주(洪州)에서는 강직한 관리로 이름이 났던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과 이설(李偰), 유생 안창식(安昌植)·안병찬(安炳瓚) 부자. 임한주(林翰周), 이근주(李根周) 등이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부터 기병을 계획했다.

하지만 홍주(洪州) 지방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홍주관찰사(洪州觀察使) 이승우(李勝宇)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시일을 천연하던 중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더 늦출 수 없다고 인근 유생들과 연락해 1886년 1월 1일 홍주성(洪州城)을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의병진(義兵陣)을 편성·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홍주의병 참여층은 양반 유생과 일반 평민세력인 농민과 관군,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들은 1894년 홍주의 관군과 함께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도 앞장서 활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홍주의병에 동학농민군의 참여는 찾기가 어렵다. 홍주의병은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불발됐다고 알려졌지만, 이미 1895년 5월부터 홍주 매평리의 채광묵과 홍주 홍북의 이근주, 안창식·박창로 등의 모병운동이 진행됐다는 점에도 주목할 일이다.

대흥(大興)과 정산(定山) 등지에서는 박창로(박창로(朴昌魯), 이세영(이세영(李世永), 이봉학(李鳳學), 송병직(宋秉稷), 이상린(李相麟), 이병승(李秉承), 김정하(金正河) 등이 참가했고, 청양에서는 군수 정인희(鄭寅犧), 전수사(前水使) 조희현(趙犧顯)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참가했다. 여기에 그동안 창의에 이리저리 회피하던 관찰사 이승우까지 형세에 밀려서나마 가담해 홍주성(洪州城) 안팎에서는 창의(倡義)의 함성으로 충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월 17일에는 김복한을 대장으로 추대해 홍주부(洪州府)관할 17군(郡)에 장병들의 동원령까지 내렸다. 청양군수 정인희를 선봉장, 이세영을 참모장으로 선임해 공주(公州)와 임존성(任存城)에 보내 점거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홍주의병이 작전계획을 세워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려 할 때 위장으로 의병진에 가담했던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가 몰래 정부측 관리와 내통해 주요 인물을 체포·투옥하면서 의병을 강제 해산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 홍주성으로 모여들던 의병들도 중도에서 해산되고 말았다.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미(海美)의 대치(大峙)까지 왔다가 돌아갔으며, 남양부사(南陽府使) 남백희(南百熙)는 수군(水軍) 수백 명을 거느리고 해상으로 오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돌아갔고, 대흥군수(大興郡守) 이창세(李昌世) 역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홍주부(洪州府) 경계까지 왔다가 돌아갔으며, 전승지(前承旨) 김병억(金炳億)도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해 홍주성(洪州城) 서문(西門)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이같이 홍주의병진(洪州義兵陣)의 봉기는 홍주(洪州) 부근 일대에서 구름같이 호응해 성황을 이뤘으나,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의 배신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중에는 이세영(李世永) 등과 같이 다시 의병을 규합해 재기 항쟁을 벌이면서 8월경까지 버틴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은 현재 홍주의사총에 잠들어 있다. 사진은 홍주아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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