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울신앙공동체, 내포천주교회 발상지·박해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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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신앙공동체, 내포천주교회 발상지·박해 중심지
  • 취재|글·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0.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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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20〉
내포문화숲길 천주교순례길
예산 신암의 여사울성지.
예산 신암의 여사울성지.

내포문화숲길은 충남서북부지역의 서산·당진·예산·홍성 4개 시·군, 26개 읍·면·동, 121개 마을 320㎞에 달하는 마을 길, 농로, 임도 등으로 연결된 숲길이다. 주제별로 내포역사인물길, 백제부흥군길,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내포동학길 등 5개로 구분하고 있다.

그중 내포문화숲길의 천주교순례길 △1코스는 16.5km로 내포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던 곳에서 시작되는 천주교 순례길이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태어난 예산 여사울성지에서 시작해 신리성지를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당진 솔뫼성지에 이르는 코스다.

△2코스는 15.4km 구간으로 잔디밭이 아름다운 합덕 신리성지에서 시작해 예당평야를 가로지르는 삽교천변을 따라 걸으면 천주교 역사의 현장인 예산 배나드리성지(인언민마르티노 사적지)를 지나 삽교성당에 이르게 되는 코스다. 

△3코스는 9.8km 구간으로 예산 삽교성당을 출발해 독립운동가인 매헌 윤봉길 의사 사당과 생가, 기념관이 있는 충의사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윤봉길 의사가 항일운동을 위해 고향을 뒤로하고 망명을 떠나던 길이자 1800년대 박해를 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읍성으로 압송돼 가던 길이다. 

△4코스는 14.4km 구간으로 덕산 충의사에서 출발해 천주교 순교자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해미 한티고개에 오르는 코스다. 한티고개는 천주교 박해 당시 처형장소인 해미읍성으로 압송되던 길로, 천주교인들이 포박당해 끌려갔던 길이다. 한서대 앞 산수저수지를 지나 해미읍내에 들어서면 해미읍성을 만나게 된다. 순교자의 흔적을 따라 해미천 변에서는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성지)를 만날 수 있는 코스다. 

△5코스는 2.3km 구간으로 홍성읍 도심의 홍주성 주변과 홍주의사총을 잇는 홍주천주교순교성지 순례코스다. 홍주성역사관에서 출발해 홍성군청과 북문교를 거쳐 홍주순교성지에 도달하게 된다. 홍주순교성지와 더불어 참수 순교 터와 신앙의 증거지인 옛 저잣거리 등 아픈 천주교 박해의 역사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코스다. 홍주순교성지를 기점으로 조양문을 거쳐 다시 홍주성역사관으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로 구성돼 있다. 


■ 한국천주교회,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
예산 여사울성지는 내포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복음을 전한 초기 순교자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1752~1801)의 생가에 있는 성지로 내포 천주교회의 심장이자 신앙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충남도문화재 178호로 지정된 여사울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로 평가받는 한국천주교의 요람으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100여 년에 걸친 4대 박해를 거치면서도 이 지역 신자들은 전국에 흩어져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예산을 지나 서해로 흘러가는 삽교천 물줄기의 천변에 있는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내포 천주교 순례길 17)에 복음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뒤 내포 신앙공동체는 조선 후기 가장 튼실한 공동체로 천주교회 성장의 한 축이 됐다. 

이처럼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의 생가터인 여사울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현장으로 성지의 넓은 뜰에는 ‘내포천주교 복음 첫터’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맞은 편에는 고딕풍의 아담한 여사울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 앞에는 순례객을 위한 야외제대 3곳이 마련돼 있는데, 제대(祭臺) 위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있고 오른쪽으로 성모상 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까지 14단계로 나눠 보여주고 있는 십가가의 길 14처(處, Via Sacra, 거룩한 길)가 있다.

내포문화숲길이 있는 충청남도 내포 지역은 ‘한국천주교의 수도’와 같은 성지이다. 이 지역에는 내포 지역 천주교의 첫 출발지이자 중심지인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생가터가 있는 여사울성지를 비롯해 내포의 첫 성당인 합덕성당, 한국인 최초 사제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에 있는 솔뫼성지, 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 신리성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순교자 중 4명이 현재 로마 교황청 성인품의 후보에 올라있는 평신도와 예비 신자들의 순교지로 천주교 일급성지인 홍주천주교성지, 무명 순교자의 생매장지인 해미순교성지 등이 모두 한 지역에 몰려있어 순례코스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가장 극심하고 잔인한 박해가 일어났던 곳으로, 연중 천주교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사울성당.
여사울성당.


■ 내포천주교 첫 출발지·중심지 여사울성지
내포 지역 천주교의 첫 출발지이자 중심지인 여사울성지는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위치해 있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1759~1801)가 태어난 곳이며, 생가터도 있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서북부지역의 지명이 아니라 총칭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여사울은 여우마을을 뜻하는 ‘여슐’ 혹은 ‘호동(狐洞)’이라고도 불렸으며, 서울과 같은 곳, 여슬(물이 빨리 흐르는 개울), 여수골(예수 고을) 등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여사울은 청양 다락골에서 예산을 거쳐 흐르는 무한천과 홍성에서 삽교 배나드리와 신리를 거쳐 흐르는 삽교천이 만나는 합수지다. 당시 홍주, 대흥, 청양, 홍산, 보령 등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너야 하는 통행로이며 나들목 구실을 했던 곳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고 해 여사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기록상 여사울에 천주교를 처음 전한 사람은 홍유한(1727~1785)이었으나, 전도 활동보다는 수계생활 정진 등 스스로 천주교적 삶을 실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존창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여사울은 이존창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으로 집안에서도 다수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배출됐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기록된 김대건과 뒤를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이 있다. 이존창 맏형의 딸은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이며 또 다른 조카의 딸은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가 된다. 

따라서 김대건·최양업 신부 모두 이존창으로부터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천주교 초기에 각 지역별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교리가 퍼져나갔으며 신앙공동체는 대부분 친족과 이웃 주민들로 구성됐다. 더욱이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 1850년대에 이르러 전국 천주교 신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농민 출신으로 예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 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돼 2년간 성무를 집행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이존창은 서울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창설멤버로 불리는 권일신 프란시스 자비에르(1742~1791)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우는 등 본격적인 천주교인의 길을 걷게 된다. 천주교 초기인 1784년 세례를 받은 후 가성직 신부로 임명돼 복음전파에 힘썼다. 가성직제는 평신도를 신부로 임명, 전교활동과 함께 성사를 집전토록 하는 것으로 천주교 교리에는 어긋난 것이었다.

후에 이존창은 가성직 신부로서 마음대로 성사를 집전한 일에 대해 반성했다. 세례를 받고 즉시 서울에서 내포로 내려온 그는 전교활동을 벌임과 동시에 1785년 ‘여사울 신앙공동체’를 설립했다. 당시 예산과 보령 등 내포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입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됐으며 김대건·최양선 신부의 친인척들이 천주교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제5대 조선 천주교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는 “내포지방 신앙공동체는 조선 천주교회에 큰 광채를 보이며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었고, 매우 유명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고 찬사를 보내게 된다. 훗날 여사울에서는 성인 홍병주 베드로·홍영주 바오로 형제 2위와 김광옥 안드레아 등 복자 9위, 이존창 루도비코 등 순교자 12위가 나왔다.<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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