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전쟁’ 평민인 민군(民軍)에 의한 구국항쟁
상태바
‘홍주의병전쟁’ 평민인 민군(民軍)에 의한 구국항쟁
  • 글·자료|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1.06 0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3〉
홍주읍성.

1895년 홍주유학자 김복한·안병찬·이설 등 홍주성 근거지 의병 일으켜
관찰사 이승우가 김복한·안병찬·이설 등 20여 명 구금해 홍주의병 해산
홍주의병은 ‘의병투쟁사의 중심에서 봉기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홍주 항일독립운동,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1894~1945년까지 이어 전개

 

홍주의병은 홍주 지역에서 유학자와 평민들이 함께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항쟁한 반일의병이다. 일제의 군사적 침략에 대항한 조선 사람들의 의병전쟁은 크게 세 차례 일어났다. 1894~1896년의 전기의병, 1905~1907년의 중기의병, 1907~1915년의 후기의병이 그것인데, 홍주의병은 이 세 차례의 의병 기간에 모두 일어났다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경우다. 어떻게 보면 사실 유일무이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1895년 12월 충청도 홍주의 유학자 안창식·박창로·채광묵·김복한·안병찬·이설·홍건 등은 홍주성(洪州城)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의 기세에 주눅이 든 관찰사 이승우는 일시적으로 의병에 가담했다가 등을 돌렸다. 이승우는 김복한·이상린·안병찬·송병직·이설 등 20여 명을 구금함으로써 홍주의병은 해산하고 말았다.

1896년 홍주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행위에 반대, 단발령 직후 봉기해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1906년 다시 의병을 봉기했으며, 일본 정규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홍주성에서 벌였다. 이 홍주성 전투는 중기의병 시기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됐다. 또한 1907년 이후에도 홍주성전투에 참여했던 의병들이 재기해 충청지역 일대에서 항일전쟁을 주도했다.

이처럼 홍주의병은 의병항쟁이 있을 때마다 의병투쟁사의 중심에서 봉기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홍주성(洪州城)’이 있었다. 또한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병오 항일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영혼(靈魂)이 묻혀있는 곳이 바로 2001년 8월 1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31호로 지정된 900의총인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이다.

홍주지역에서의 끈질긴 항일투쟁, 의병봉기를 전개할 수 있었던 직접적 계기의 원천에는 정치, 사회, 군사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일제는 당시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을 발발해 조선을 침략했으며,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했다. 또한 단발령을 공포해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모조리 파괴했다. 여기에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을사늑약을 강제했다. 이러한 일제의 정치, 군사적으로 국권 찬탈당하는 치욕에 유교지식인 뿐만 아니라 평민들이 합세해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한 저항은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의병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가 평민인 민군(民軍)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홍주의병(洪州義兵)’의 의의가 있다.
 

홍주의사총.
홍주의사총.

■ 을미의병, 재야 유생 주축 일반 평민층 가담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군사적 위협은 더욱 노골화됐다. 이에 따라 1894년 이후 조선인들은 반침략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했으며, 의병을 조직해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피의 항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의병항쟁은 한민족의 반침략, 반개화 투쟁이며 아울러 국권침탈 이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이며 인적인 연원이 된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1895~96년에 일어난 을미의병은 재야 유생을 주축으로 하고 일반 평민층이 여기에 가담해 봉기했다. 곧 양반 유생이 상층 지도부를 형성했지만, 일반 전투원인 병사부는 평민층이 담당했다. 의병은 유명한 유학자나 전직 관료, 지방 유생, 향리, 해산군인, 빈농, 머슴 등 매우 다양한 계층이 우국충정의 정신으로 구국항쟁을 전개했다. 의병들은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고, 일제에 체포돼 옥중 순국한 의병들도 많았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일제는 가장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 전남 지역을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펼침으로써 수 많은 의병들이 죽거나 체포됐다. 일제 군경의 포위망을 벗어난 의병들은 경술국치를 전후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국내에 잔류한 경우에는 광복회와 독립의군부에 가담해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을 주도했다.  
 
조선은 500여 년간 단일민족의 왕국을 지속해왔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내우외환을 헤쳐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94년 벽두부터 동학농민혁명의 거센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됐지만  효과적으로 진정시킬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일본 군대의 힘으로 겨우 진정시켰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일본은 조선의 국권을 침탈했으니, 이른바 갑오변란과 을미사변이 그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했으며, 일본의 조선 정책을 반대하는 명성왕후를 무참히 시해했다. 이어 의복제도의 변경과 단발령을 공포하는 등 국권침탈을 자행했다. 

이에 명분을 중시하는 지방의 유학자들이 위정척사 운동의 일환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1894년 8월 공주 유생 서상철은 경상도 예안향교에서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관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다. 아마도 19세기 말 최초의 거의를 시도했던 것이다. 1년여 후인 1895년 말 문석봉은 충청도 유성에서 국수토적(復讐討賊), 다시 말해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논리로 의병을 일으켰다. 

 

홍주읍성 홍화문

■ 홍주의병 대표적 인물 김복한과 이설
홍주의병의 사상적 기반으로는 남당학파를 들 수 있다. 남당 한원진의 학문과 사상은 주자·율곡의 심법학(心法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우암(尤庵)의 ‘직’(直)의 심학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이단론과 직 사상이 동향의 후배들에게 전수돼 생사를 초월해 의병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이 있다.

홍주의 항일독립운동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외세의 침범에 대항해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홍주 항일운동은 초기에는 화이론에 바탕을 둔 척사의병의 성격이 강했으나, 점차 후기로 접어들면서 의병은 유림이 주도한 의병진이라 하더라도 척사론에만 매몰되지 않고 국제정세를 수용하는 현실 인식을 보였다. 이러한 정신은 이후 일제강점기 백야 김좌진과 만해 한용운의 독립전쟁으로도 계승됐다. 또한 문화적 충격과 전통질서, 가치관이 와해되는 가운데서도 신교육을 수용해 활발한 계몽운동도 전개하며, 새로운 근대의식을 자각적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특히 김복한이 보여줬던 ‘사공(事功)의 정신’은 사회사상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김복한은 외세의 무력 침탈 앞에서 성리학의 의리정신이 수행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우선 나라의 위기를 구해내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학파와 학설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힘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야말로 도맥을 지킬 수 있는 최후 방편이라고 봤던 것이다. 이러한 사공의 수행은 남당 한원진이 가장 높은 경지였다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의 행위도 스승이었던 남당이 수행했던 사공을 계승한 것이라는 확신과 자의식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근대성이 지향하는 창조적 파괴는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개화의 대척점에 섰던 위정척사는 그런 면에서 근대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근대성, 올바른 근대성을 형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홍주의 정신에서도 이러한 근대성의 모습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사공의 정신이나 인본주의 사상, 남당 한원진의 대의론과 붕당타파, 충과 역의 분별, 공사의 구별 등은 근대사회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원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주의병은 안병찬 등 지방의 선비들과 김복한을 비롯한 관료 출신의 연합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홍주관아를 점령하고 김복한의 지시에 따라 경무청을 부수고, 참서관과 경무관이 동문 밖으로 끌어내 결박 구타했다. 관찰사 이승우는 이 기세에 눌려 의병에 참여할 것을 승복했다. 12월 3일 홍주부 관내에 창의소가 설치됐으며,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했다. 하지만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인 12월 4일에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이승우는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못해 참여했으나 실패가 두려워 배반한 것이다.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한 23명이 구금됐으며, 1월 12일 이들 가운데 김복한 등 6명이 서울의 한성재판소로 이송됐다. 이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임금의 특지로 전원 사면 석방됐다. 홍주의병은 김복한·이설과 같은 노론과 안병찬 등의 소론이 주도세력으로 동참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