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사건과 ‘통상수교 거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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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사건과 ‘통상수교 거부정책’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3.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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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35〉
  • ​​​​​​홍성 구항의 ‘대원군 척화비’

홍성의 ‘대원군 척화비(大院君 斥和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1984.5.17.지정)’는 홍성군 구항면행정복지센터에서 홍성~서산 간 국도 29호선 건너편 500m지점인 구항면 오봉리의 막다른 도로 끝 자연암석 위에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척화비<사진>의 비문에는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음과 같으니,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라고 새겨져 있다.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라는 뜻의 한문으로 글씨를 썼다.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더욱 그러한 의지를 굳혀,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경계하여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고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중요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홍성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넓적한 자연암석 위에 비의 몸체를 꽂아놓은 모습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할 수밖에 없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 문구를 적어 놓았다.

고종 8년(1871) 음력 4월에는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됐다. 이 비는 충남 지방에 남아 있는 3기(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아산군 신창면·예산군 대흥면 대흥동헌)의 척화비 중 하나로, 급변하던 구한말 당시의 상황과 쇄국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홍성의 ‘대원군 척화비(大院君 斥和碑)’도 이때 세워졌다. 처음에는 구항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편인 국도 29호선 도로변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흥선대원군의 서구열강과 통상수교 거부 의지가 어떠했는지가 짐작이 된다. 흥선대원군도 처음부터 통상수교 거부 의지가 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863년 고종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전권을 장악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긴박하게 흘렀다. 불과 3년 전인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한 청나라에서 베이징조약을 맺고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겨주면서 조선과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이 맞닿았다. 흥선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1866년에 겪은 병인양요에 이어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독일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려 했다는 보고를 받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서기 1868년(고종 5년)에 가야산(伽倻山;678m) 자락에 있는 남연군 묘가 수난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유명한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다. 독일인 오페르트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오페르트는 통상요구가 거절되자 2년 후인 1868년에 남연군묘의 도굴을 시도했다. 조선 사람들의 조상 숭배사상이 강한 것을 이용해, 도굴한 시체와 부장품을 볼모로 흥정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계략이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아산만을 통해 덕산에 들어와 발굴 도구를 탈취해 밤새도록 남연군묘의 도굴을 시도했다. 하지만 묘광이 두꺼운 석회로 견고해 실패하고 날이 밝자 도주했다. 급보를 받고 충청 감사가 군병을 급히 파견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도망가고 난 뒤였다.

특히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 등 무력을 사용한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성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신미양요까지의 사건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구열강의 무력을 앞세운 통상교섭과 수교를 거부하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수립했다. 

흥선대원군의 최대 실책으로 쇄국정책을 꼽는다. 사실 ‘쇄국정책’이란 말은 일제가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고 ‘대외통상수교거부정책’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흥선대원군은 대외적으로 수교거부정책을 펼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흥선대원군 집권 초기에는 주변에서 천주교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흥선대원군이 이를 만류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이거나 혹은 천주교에 굉장히 우호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부인을 통해 알게 된 프랑스 선교사들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청나라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대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를 흥선대원군은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르다는 뜻으로, 어떤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 라고 말한다. 그래서 프랑스 제독에게 흥선대원군이 정중히 편지를 쓴다. 하지만 프랑스 측에서는 대원군의 제의를 거절해 버린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크게 분노해 1866년 초에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이 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됐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이 병인박해(1866)이다.

살아남은 선교사 3명 중, 한 명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침략해 조선과 프랑스 간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고 로즈는 먼저 한양 근교인 강화도를 점령한다. 이것이 병인양요(1866)이다.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현대적 화력에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프랑스군에게 항전하지만 분패한다. 이에 조선은 양헌수에게 549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벌여서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격퇴했다.’한관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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