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확실한 ‘주류성(周留城)’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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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확실한 ‘주류성(周留城)’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4.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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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37〉
  • 홍성장곡산성(洪城長谷山城)

‘홍성장곡산성(洪城長谷山城)’은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산28-2 일원에 있는 백제의 산성이다.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60호로 지정됐다.

장곡면 산성리 일원(대현리, 옥계리 일원) 해발 256m의 산에 쌓은 성으로, 성 둘레는 약 1352m이다. 장곡산성은 오서산(해발 791m)에서 북동쪽으로 연결되는 남쪽 봉우리(해발 255.5m)와 북쪽 봉우리(해발 208.8m)를 연결해 돌로 쌓은 성이다. 산성리 주변은 지세가 험하고 계곡이 좁아, 군사상 요충지로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옛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 되는 예산 대흥임존성(사적 제90호)과는 12.6km, 당진 혜성과는 37km, 청양 정산의 두륭융성과는 23km, 공주와는 34.5km, 부여와는 27km의 거리를 두고 있는 곳이다. 

장곡산성 주위에는 학성산성, 태봉산성, 소구니산성이 띠를 이루듯 이어져 있어, 지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성은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산성 안에서 건물터의 주춧돌·기와 조각·토기류가 발견됐다. 주변 지역에서도 ‘사시·사시량·사라’라 새긴 기와 조각과 문초석, 돌덧널무덤(석곽묘)에서 발견된 청동제 방울, 백제 토기류 등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장곡산성은 백제 사시량현의 정치, 행정적으로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지형적 조건으로 볼 때 백제부흥군의 거점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장곡산성의 문지에서 살펴보면 비교적 윤곽이 뚜렷한 산성이다. 성벽은 매우 가파른 산비탈에 돌로 외벽을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성돌은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다듬어 쓴 흔적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9 홍주목 고적조(古蹟條)에는 성벽의 둘레가 6040척에 달하고 성내에 우물이 2개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에는 이미 폐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고려 시대 이전에 축성된 성곽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석성산의 정상부에서 중복에 걸쳐 삼태기식으로 축성돼 있다. 서쪽 성벽이 정상부를 지나는데 비해 동쪽 성벽은 중복을 지나고 있어 서고동저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축성했는데, 자연 암반이 놓여 있는 곳은 따로 성벽을 축성하지 않고 암반을 그대로 이용했다. 나머지 구간은 석성으로 축성했는데, 치석하지 않은 자연할석을 이용해 외면만 맞추면서 쌓아 올렸다. 성내의 지형이 서고동저의 형태로 되어 있어 대부분의 건물지는 동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밭이나 논으로 개간되고 있는 곳의 대부분이 원래는 건물지 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7년도 발굴을 통해 7칸×3칸(외진주 포함 9칸×5칸) 규모의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물로 볼 때 성곽은 통일신라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정확한 축성 시기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장곡산성은 동쪽인 예산 광시 방향의 골짜기가 탁 트인 것으로 볼 때, 서쪽에서 오는 당이나 고구려의 적을 방어하는 용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내부 골짜기는 그다지 넓지는 않은 편이나 건물지도 있고, 저수지도 있다. 저수지 부근에는 우물 같은 웅덩이도 있다. 우물 주변에는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최근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건물이 있던 자리의 석축 모습이나 감나무, 뽕나무, 앵두나무 등 살림살이의 흔적을 파악할 수도 있다.

아직도 넓고 평평한 건물지는 산성이 있던 당시에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규모로 보아 골짜기는 그리 넓지도 않고 상주하는 사람이나 주둔한 군사가 임존성만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홍성 사람들은 이 산성을 ‘석성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갯마루에는 주류성의 안내판이 설치돼 있는데, ‘660년, 백제의 사비성과 웅진성의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성이다. 왜에 있던 풍(豊) 왕자를 모셔와 왕통을 잇고 주류성을 왕성으로 삼아 백제부흥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던 곳이다. 주류성으로 불리는 곳은 여러 곳이 있는데 장곡산성 안에서 발견된 옛 건물터와 주변의 지형과 전해오는 전설 등을 통해 이곳 사람들은 장곡산성이 주류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주류성의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 중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어서 농사짓기 어려운 당으로 백강과 가깝고 하루만에 사비성 공격이 가능하며 임존성과도 가가운 거리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홍성군 장곡면의 장곡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대련사를 세운 스님 도침, 왕족 복신, 장군 흑치상지,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 등의 행적과 공적, 그리고 맹약에서 배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역사적 사실에는 이의가 없으나,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 또는 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이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이 여러 가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홍성 사람들은 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이곳 ‘장곡산성’이 가장 확실한 ‘주류성(周留城)’이고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곡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근거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홍주목조에서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이 지심주라고 고쳤다”라고 한 것과 ‘건지산성은 고려 시대에 축성되어 조선 시대에 폐성이 되었다’는 충청매장문화연구원의 건지산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장곡산성을 주류성으로 보고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는 설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포지역 사학자였던 고 박성흥은 답사와 여러 논고를 통해 “주류성은 바로 장곡산성이고 백강은 당진 해안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임존성에서 홍성의 소구니 산성, 태봉산성, 학성산성, 장곡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일련의 산성들이 마치 하나의 전선이 돼 수도인 사비성이나 웅진성 가까이에서 방어하고 있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요거점이나 마지막 저항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백제부흥군의 주둔지가 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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