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신사’자리에 세워진 홍동3·1공원 ‘삼일각’
상태바
일제강점기 ‘신사’자리에 세워진 홍동3·1공원 ‘삼일각’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4.29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0〉
  •  홍동3·1공원과 삼일각

 홍동면 운월리 296번지, 홍동면사무소에서 장곡방향으로 가는 길, 홍동면사무소와 홍동초등학교를 품고 있는 홍동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는 ‘홍동3·1공원과 삼일각(三一閣)’이 있다.

1919년의 3·1만세운동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탈당한 우리 민족의 주권과 생존권을 되찾고자 전개한 민족독립운동이었다. 3·1만세운동은 민족적이고 범 민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각 지방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의 사상적 기조는 유교의 ‘군사부철학(君師父哲學)’에 기초를 둔 반일 감정과 천도교적 민족주의, 각종 학교와 기독교를 통해 들어온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홍성지역에서도 충청남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3·1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홍성지역의 3·1만세운동의 주체는 농민 중심의 민중이었다. 홍성지역은 항일의병 활동과 근대적 학교설립을 통해 근대 학문과 문물의 수용이 민족의식의 형성에 기여했고. 이는 3·1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홍동지역에서의 3·1만세운동은 4월 4일, 5일, 8일의 3일 동안 네곳에서 전개됐던 것으로 2017년 6월에 발행한 ‘홍동면지’에 기록하고 있다. 4일에 전개된 3·1만세운동은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형태였으나 정확한 참석인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5일의 만세운동은 신기리 만경산에서 전개됐는데, 홍동면민 대부분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16년 12월에 발행된 홍성군지에 의하면 홍성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7일 홍성읍 장터에서 수 많은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했으며, 시위 군중에는 김좌진의 제종제인 김종진(金宗鎭)이 합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만세시위의 영향으로 홍성군의 동북부 4개면(홍북·금마·홍동·구항면)의 24개 촌락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놀란 일제의 수비대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10여 명이 순국했고, 다수가 부상 또는 체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4월 4일에 홍성경찰서 부근 홍북·금마·홍동·구항 4개 면의 24개소에서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했음이 확인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홍동지역의 3·1만세운동에 대한 기록과 증언에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1994년 3월에 발행된 ‘홍동면지’에는 ‘홍동면 신기리 이제경(李齊經), 조우식(趙愚植) 등은 3월 5일 밤 뒷산인 꽃동산에 모여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갑자기 총성이 들리더니 순식간에 사방이 피바다로 변했으니 이희도(李羲圖), 한명교(韓命敎) 등은 현장에서 죽고 이석만(李錫滿), 안중호(安重浩) 등은 관통상을 입었다. 경찰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13명을 구속, 태형을 가했다. 성낙붕(成樂朋)은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했으며, 그로 인해 두 아들이 부인과 함께 사망해 가정 전체가 몰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스물한 살로 가장 나이가 어린 참가자로 횃불을 잡았던 홍동면 수란리의 조용준은 1986년 ‘홍동소식’ 3월호와 1989년 홍동 출신 이번영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919년 3월 4일 저녁 해가 오서산으로 넘어가자 홍동면 신기리 만경산 꼭대기 공동묘지에 신기, 금당, 수란, 팔괘, 구정리 주민 37명이 모여 횃불을 밝히며 2시간 가량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고 밝히고 있어 1994년 발행된 홍동면지에 3월 5일 홍동면 신기리 만경산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돼 있지만 만경산 만세운동 당시 직접 횃불을 들었던 조용준은 3월 4일 저녁이라며 구체적으로 증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홍동면지는 이희도와 한명교가 현장에서 죽고 성낙붕은 고문의 여독으로 뒤에 사망했다고 기록했으나 조용준의 증언에 의하면 성낙붕이 현장에서 죽고 이희도가 뒤에 사망한 것으로 다르게 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주목되는 점이다.

앞의 증언대로 홍동의 3·1독립만세운동이 3월 4일 밤이나 면지 기록대로 5일에 일어났다면 홍성군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돼야 할 일이다. 3월 7일 홍성시장 만세운동이 홍성군 최초로 기록되고 있으니, 홍동 만세운동이 최소 2~3일은 앞서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홍동면민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병익(구정리)과 이창우(팔괘리) 등이 발기해 홍동노인회와 기념비 건립을 제안, 1973년 1월 5일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노인회 자체자금 5만 원과 면내 유지들의 성금 4만 3700원, 재경홍동향우회 성금 4만 5000원으로 홍동면 운월리 296번지에 ‘기미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고, 같은 해 3월 1일 제막식을 했다.

1978년에는 홍성군의 지원으로 비각(정측면 각1칸의 팔작지붕)을 세우고 ‘삼일각(三一閣)’ 현판식도 거행했다. 

홍동면지에는 현재 삼일각이 위치한 장소가 홍동면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동쪽과 남쪽, 북쪽 등 사방이 잘 보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건립 장소로 결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비각 건립을 주도한 고 이창우 전 홍동면노인회장은 해방이 되면서 일본 천황을 경배하는 신사(神社)를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비석을 세웠으며, 그런 사연을 적은 문서를 비닐봉지에 담아 비각 밑 땅속에 묻어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3월 1일에는 홍동노인회 주관으로 기념식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또 홍성군의 지원으로 매년 면내 효자·효부와 선행학생을 발굴·표창해 선영의 뜻을 받들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정부로부터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받은 홍동의 독립운동가는 이희도, 황윤성, 이강인, 정진우, 최명용, 최중식 6명이다. 3·1독립만세운동을 하다 희생된 성낙붕, 조용준, 한명교, 이석만, 안중호 등은 공식 애국장이나 포장을 받지 못했다. 직계 자손이 없거나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동면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사망하거나 형을 받은 애국지사는 현재 63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