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독립정신 고취 장소로 활용했던 ‘창주사(滄洲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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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독립정신 고취 장소로 활용했던 ‘창주사(滄洲祠)’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5.0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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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1〉
  •  홍동 운월리 ‘창주사(滄洲祠)’

홍동면 운월리 창정마을(홍장남로 672번길 16)에 위치한 ‘창주사(滄洲祠)’는 지난 2014년 3월 17일 홍성군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된 유적이다.

홍동 운월리는 신안주씨(新安朱氏) 집성촌이다. 신안주씨의 시조(始祖)는 중국 송나라 때 대학자인 ‘주희(朱熹, 주자)’다. 이를 모신 ‘창주사(滄洲祠)’는 1804년(순조 4) 신안주씨의 문중사우로 건립됐고, 1804년 주성근(朱聖根)이 주자의 영정을 모시고 삭망일에 분향을 올리면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1857년에 ‘주자화본(朱子畵本)’을 봉안했으며, 1889년에 주씨 문중이 옛 사우를 수리했다.

1929년 홍주의병의 지도자였던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과 유교부식회가 홍주향교 명륜당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창주사(滄洲祠)’로 자리를 옮겨 ‘도광재(道光齋)’라는 현판을 걸고 학문과 독립정신 고취의 장소로 활용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 창주사는 독립운동을 위한 회의 장소로 이용되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해산하는 등의 장소로 이용됐던 곳이다. 이곳에서 회의가 끝난 후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지로 흩어져 회의에서 나왔던 소식을 전해 홍성의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창주사가 면소재지와 가까운 곳이 위치해 있었지만 평상시에는 사람이 상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을 피할 수 있었던 최적의 장소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창주사(滄洲祠)’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동면 운월리에 위치한 ‘창주사(滄洲祠)’는 신안주씨 안천군 칠자손 종친회 소유로, 1676㎡ 규모의 대지에 36.77㎡ 규모의 사당 1채로 구성돼 있다. 창주사는 본래 신안주씨의 문중사우였으나 1889년(고종 26)에 주씨 문중이 고쳐 지었고, 1900년에는 충청 서북부 지역의 유학자들이 고친 이후 홍성지역 유학자의 활동 기반을 제공하며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도 유학의 맥을 잇는 주요 거점으로 부각됐다. 또한 창주사에 1924년에는 유학 정신의 실천 장소인 ‘도광재(道光齋)’를 지었다. ‘도광(道光)’이란 ‘주자의 책을 만길이나 쌓고 도를 빛내는데 유익함을 주자’는 의도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920년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은 유교의 진작을 통하여 ‘내수의 장책’을 마련할 것을 권했는데, 그 일환으로 뜻을 잇고자 조직해 설립한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와 1927년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 설립 과정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민족정신의 계승을 위한 유학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는 등 민족운동에 기여했던 장소로 전해지고 있다. 유교부식회는 1927년 김복한 의 장자인 김은동과 문인인 오석우, 이우식, 김노동, 성원경, 전용욱 등 6명이 발기인으로 조직하고 1927년 5월 5일 창립총회를 개최해 이상린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한말 홍주의병과 호서유림단 파리장서사건의 지도자였던 김복한의 문하생들이다. 유교부식회는 성리학연구원을 부설하고, 외래사상으로 침체돼 가는 유교 사상을 부흥하고 도의심을 앙양하며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할 목적으로 설치됐다. 월간지를 발간하기 위해 ‘인도사(人道社)’를 설립해 1928년 3월 1일부터 월간지 ‘인도(人道)’를 발간했다.

한편 신안주씨 종친회는 창주사에서 지역 유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2월에 춘향제를, 음력 8월에는 추향제를 올리던 제향을 지금은 봄에 한차례 제향을 올리고 있다. 

신안주씨 ‘창주사(滄洲祠)’ 소장유물 총 275점은 지난 2018년 홍주성역사관에 기탁했다. 이 기탁 유물은 조선 후기 신안주씨 문중의 유교적 가풍과 교육 방식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안주씨는 남송 시대의 대학자이자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후손으로, 주자의 증손 주잠(朱潛, 1194~ 1260년)이 고려 때 몽골의 침입을 피해 우리나라에 정착하며 이어져 왔다. 그중 홍동면 운월리에 터를 잡은 지파가 바로 홍성의 신안주씨이다.

신안주씨 ‘창주사(滄洲祠)’의 기탁유물 가운데 족자류는 주자의 글씨를 판각해 찍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도 있으며, 특이하게 중국 남송 시대 충신으로 이름 높은 악비(岳飛) 장군의 글씨를 모사한 족자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전적류는 문집인 ‘매산집’ 을 비롯해 사서삼경을 대부분 갖추고 있어 유교적 가르침에 충실했던 신안주씨 문중의 학구열을 짐작할 수 있다. 고문서류는 주자의 사당인 창주사에서 작성한 의례 문서들로 이뤄져 있으며, 최근까지의 제사 기록이 잘 보존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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