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장곡을 관향으로 하는 여양진씨’의 ‘경덕단·숭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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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장곡을 관향으로 하는 여양진씨’의 ‘경덕단·숭덕재’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7.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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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8〉
숭덕재.
  • ‘여양진씨’의 재실과 사당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홍주목 인물조에는 고려시대 홍주의 인물 네 명의 기록이 나온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홍규(洪規;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운주 성주 긍준(兢俊)에게 홍씨(洪氏) 성을 하사하며 준 이름)는 태조 왕건과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홍주 지역의 위상을 높였던 인물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진준(陳俊), 진식(陳湜), 진화(陳崋) 세 사람은 모두 ‘여양현(驪陽縣) 사람’이며, 장곡(長谷)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시조인 진총후(陳寵厚)의 아들이다.

원래 ‘여양(驪陽)’은 백제시대(百濟時代)의 사시량현(沙尸良縣), 또는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신량현(新良縣)으로 바뀌어 결성군(結城郡)의 영현(領縣)이 됐다가 고려 태조 23년(庚子, 940)에 ‘여양현(驪陽縣)’으로 개칭하고 감무(監務)를 뒀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감무(監務)를 폐(廢)하고 ‘홍주(洪州)’에 속하게 됐다.

고려 명종 원년(辛卯, 1171)에 홍주군(洪州郡)이 양광도(楊廣道) 청주목(淸州牧)에 속했다가 조선 태조 4년(乙亥, 1395)에 폐현(廢縣)되고 홍주군(洪州郡)에 편입됐다. ‘홍주(洪州)’는 고종 32년 을미(1895)에 홍주부(洪州府)가 됐다가 광무 원년(光武 元年, 丁酉 1897) 에 다시 홍주군(洪州郡)으로 됐고, 일제강점기 행정구역개편 때인 1914년(甲寅)에 결성군(結城郡)과 병합(倂合)해 홍성군(洪成郡)이 됐다. 옛 ‘여양현(驪陽縣)은 지금의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일대(一帶)다. 이 사실기록(事實記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9 고적편(新曾東國與地勝覽 卷19 高蹟編, 충청남도지연혁편(忠淸南道誌沿革編),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 149 홍주편(朝鮮王朝實錄 中 世宗實錄 卷149 洪州編)에 기록하고 있다.
 

여양진씨 사당·재실의 ‘경종문’.

옛 여향현(驪陽縣)이었던 장곡면 산성1리 반계마을에는 여양진씨 제실과 사당이 있으며, 옆쪽에는 오늘날 군청이었던 ‘예당큰집’이 있다. 산성1리 반계마을에 위치한 여양진씨 제실과 사당인 ‘경덕단’과 ‘숭덕재’는 여양진씨의 시조와 직손 등 11위패를 모시고 있다. 시조 진총후(陳寵厚)는 고려 예종 때 무관 벼슬을 지내고 1126년(인종 4)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오르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진씨(陳氏)는 중국 송나라 복주(福州) 사람인 진수(陳秀)가 우윤(右尹)벼슬을 지내다가 요금(療金)의 난을 피해 고려에 건너와 ‘여양현(驪陽縣) 덕양산(德陽山)’ 아래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결국 인종 때 상장군으로 여양군의 봉작을 받아 지금의 홍성 장곡면 산성1리 반계마을에 터를 잡고 본향(本鄕)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양진씨(驪陽陳氏)의 본관(本貫·貫鄕)이 덕양산(德陽山) 인근인 홍성 장곡면(長谷面) 일대인 것이다.

2세인 진준(陳俊, ?~1179)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용력이 있어 군졸의 대열에서 방탁돼 공로를 쌓아 위장군(衛將軍)이 됐으며, 명종 때 여러 번 벼슬을 전전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승진됐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을 학살하고 다시 문신들의 집을 헐어버리려고 하자.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집까지 헐어버리면 그 처자들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므로 사람으로 할 일이 아니라 하면서 만류해 많은 문신들이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가리켜 “음덕이 있어 그 뒤가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라고 칭송했다고 전한다.

1174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원수 윤인첨(尹麟瞻) 아래 좌군 병마사가 돼 서경에 가서 조위총(趙位寵)을 쳤으며, 그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됐다. 이듬해 병부상서가 되고 다시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올랐다. 성품이 소박하고 강직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왕도 중히 여겼다고 한다. 1179년(명종 9) 6월 4일 세상을 떴다. 

3세인 진광순은 대장군을, 둘째 광수는 병부상서, 셋째 광경은 상장군, 넷째 장의는 대장군, 다섯째 광현은 추밀원부사 대장군을 역임했다. 4세인 진담은 장순의 아들로 문하시중을, 진식은 광수의 맏아들로 예빈성경과 지나주사를 끝으로, 진택은 광의의 아들로 판전농시사를 지냈다. 홍성 장곡면 산성1리 반계마을의 ‘여양진씨’의 경덕단과 숭덕재는 1970년 4월에 설단 후 1983, 1986, 1988, 1990, 1995년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정비했으며, 매년 양력 10월 3일에 추향을 봉행하고 있다. 여양진씨는 장곡면 산성1리 돌이 많은 시냇가마을인 반계마을에 가장 먼저 터를 잡기 시작해 1960년대까지 반계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뤘다. 본래는 여양원이 있었다고 해서 ‘여양굴’로 불렸고, 으뜸이 되는 마을이라 ‘원골’ 또는 진씨들이 사는 골짜기마을이라 해 ‘진골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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