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호 양반집, ‘99칸 반’ 영화는 사라졌어도 자취는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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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 양반집, ‘99칸 반’ 영화는 사라졌어도 자취는 곳곳에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8.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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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51〉
  • 갈산 전용일 가옥 (田溶一 家屋) (충청남도민속자료 제11호)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326-2(상촌로 9번길 21-1) 갈산중·고등학교 인근에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전용일 가옥(田溶一 家屋)’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은 예전에는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높은 담장을 두른 전용일 가옥은 처음에는 ‘99칸 반’ 규모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99칸 반’의 집, 요즘 계산으로는 쉽게 그 규모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기와집은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일 가옥(田溶一 家屋)은 전체적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을 갖춘 튼 ‘ㅁ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안채만 보아도 이 집의 규모를 알 수 있어 현재 대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문은 안채를 드나드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바람벽으로 안채가 직접 보이는 것을 막았다는 설명이다. 두 칸의 대청에 안방을 좌우에 두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28칸의 안채는 바람벽을 둔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청과 온돌방을 두고, 좌우의 날개채를 달아 남향을 향한 집이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ㄷ자’형을 띤 집의 구조지만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튼 ‘ㅁ자’형이다, 중문이 달린 중문채와 안채의 날개채 사이에는 쪽문을 낸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구조로 축조돼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자리에 터를 잡고 있는 99칸 반의 대저택인 충청도 양반집 가옥이다. 

예전에는 100칸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칸을 뺀 99칸의 집을 짓는 것이 지방의 토호들이나 세도가들이 집을 짓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용일 가옥(田溶一 家屋)은 그보다 반 칸을 더 달아낸 ‘99칸 반’의 집이었다고 전해진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 후원을 보면 이 집의 세를 짐작할만하다. 현재는 안채를 중심으로 네모난 대지 위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안채만이 남아 있지만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용일 가옥의 가세를 알기에 충분하다는 평이다. 

안방의 지붕보다 낮춰 방과 부엌이 구성됐고, 건넌방과 부엌 그리고 곳간 방과 부엌 등을 연달아 건축했다. 중문채에는 방이 없이 모두 곳간을 낸 것으로 볼 때 많은 식솔을 거느린 대부호의 저택임을 알 수가 있다. 전용일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의 건물에는 팔각 돌기둥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없고 돌기둥만 갈산중학교에 옮겨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로써는 상당한 재력의 부호였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집안 곳곳을 살펴보면 이 집이 다른 집에 비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쪽문의 문턱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전용일 가옥(田溶一 家屋)의 특징은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들이 크고, 가공기술이 뛰어나다는 점을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 후기 건축 기술과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집은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대표적인 충청도 양반집 가옥이다.

또 바람벽을 막은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방과 부엌 등을 덧달아 냈고, 부엌이나 광 위에는 까치구멍을 낸 살창들도 견고하게 보인다. 목재 하나라도 흐트러짐이 없는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면을 보면 우측으로 너른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는데, 안채에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여느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좋은 목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의 날개채와 중문채 사이를 연결하는 쪽문의 부재조차도 대단하게 건축했다. 안채를 둘러쌓은 담장의 높이가 일반적인 고택보다 훨씬 높아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우측으로는 건넌방과 부엌, 광들을 건축해 놓았는데, 자재들이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을 만큼 견고하다. 부엌에 건넌 방을 드렸는데 문 위에 까치구멍을 낸 것을 보면, 이 방은 곳간 방으로 보인다. 중문과 연결이 된 중문채는 모두 광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그런 많은 광이 필요했을 정도로 식솔들을 많이 거느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주(홍성) 지역의 1800년대 대부호 양반집으로 알려진 전용일 가옥(田溶一 家屋), 영원한 세도는 없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하는 집으로 남아 있는 안채의 규모나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제는 ‘99칸 반’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어도 집안 곳곳에는 그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안채의 뒤편에 있는 후원만 보더라도 당시 이 집의 규모가 가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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