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첫 을미의병 봉기지 양평, ‘지평의병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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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첫 을미의병 봉기지 양평, ‘지평의병기념관’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09.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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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7〉
의병의 식량·무기를 비축한 주둔지로 총사령부 역할을 했던 양평 용문산 용문사.
의병의 식량·무기를 비축한 주둔지로 총사령부 역할을 했던 양평 용문산 용문사.

 을미의병의 첫 봉기 지역으로 알려진 경기도 양평의 ‘지평의병’
양평의 지평의병은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면서 불이 붙었다
일본군, 의병의 식량·무기 비축한 주둔지 용문사·상원사 불질러
지평의병기념관 ‘희망의 횃불, 지평의병’ 주제로 6개 테마 구성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의 명분과 군사적 이점을 선점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했다. 경복궁 점령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만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일본의 군사적 억압을 받고 있던 조선은 삼국간섭 이후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삼국간섭으로 랴오둥(遼東)을 청나라에 돌려줘야 했고,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배권도 상실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회복하고자 친러 내각의 핵심이었던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어 성립된 친일 내각은 단발령을 실시했으나 단발령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은 유교국가로 효를 중요시했는데, 효의 기본을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고 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잘 보존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단발령의 실시를 문명인을 ‘금수(禽獸)’로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경복궁 점령 이후 지속된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과 조선인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 반대를 기치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경기지역에서는 선구적으로 단발령을 공포한 다음 날인 1895년 12월 31일(음력 11월 16일) 이천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이후 서울에서는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들어섰다. 하지만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변한 것이 없었다. 친일 내각이 무너졌지만 여전히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고,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억압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의병항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경기지역 후기의병은 1907년 7월 안성, 이천, 용인, 진위 등에서 먼저 일어났으며, 8월 1일 군대 해산 이후에는 수원·죽산·여주 등지로 확대됐다. 이어 양근·지평·음죽 등지로 확산돼 갔으며, 1909년 후반까지 400여 명의 의병 지도층이 경기도를 무대로 활동했다. 의병항쟁 초기에 중심이 된 지역 중 하나인 양평의 지평에서는 조인환, 권득수, 신창현 등이 용문산의 용문사와 상원사 등을 근거지로 활동했으며, 해산 군인인 권중식, 관동병영장(關東兵營將) 정대무, 최태평 등도 활동했다. 이렇듯 을미의병의 첫 봉기 지역으로 알려진 경기도 양평군은 ‘지평의병기념관’과 ‘의병의 거리’를 조성하고 ‘을미의병 축제’까지 열고 있어 ‘의병’에 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다.
 

■ 일본군, 116년전 용문사·상원사 등 불 질러
1907년 7월 1일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일제의 이러한 폭거(暴擧)에 분노한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의병의 무력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자발적인 의병들은 1907년 정미년(丁未年)에 일어났다고 해서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고 한다. 이 시기 경기 양평도 의병들의 항일 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무장군대를 동원해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인 용문사를 습격해 불을 질렀다. 

당시 양평에서 봉기한 권득수(權得洙), 조인환(曺仁煥)을 비롯한 의병들은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중심으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에 비해 열악한 조건의 의병들은 용문사에서 퇴각해 상원사와 사나사로 피한 후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상원사와 사나사까지 소각(燒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항일의병의 근거지였던 양평 용문산의 용문사와 상원사, 사나사의 입간판에는 116년 전의 일을 전하고 있다. ‘양평의병 전투지-용문사’에는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해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활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아 인근 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때 용문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됐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원사 입간판에는 “…용문사를 습격해오자 상원사로 후퇴하여 항쟁하였다. 이때 상원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양평 옥천의 사나사도 마찬가지다.

아카시(明石)를 위시한 일본군은 의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했을 식량과 무기를 비축한 주둔지였던 용문사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였던 상원사에도 불을 질렀다. 사나사에도 일본군이 쳐들어와 불을 질렀다. 

특히 지평(砥平, 양평의 옛 지명) 출신 의병장 이연년(李延年)이 의병을 모집해 용문사를 주둔지로 삼았다. 이연년 의병장은 군사를 매복해 기습하고 후퇴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해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했다. 조인환 의병장도 용문사를 근거지로 해서 인근 지역의 관아,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용문사는 의병항쟁의 총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들은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신속한 유격전을 거듭하며 깊은 산속에 자리한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기지(基地)로 적극 활용했고, 전과(戰果)도 거뒀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 근거지와 후원하는 세력을 방화, 살육하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정미의병에 앞서 1895년~96년에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 때도 스님들의 참전(參戰) 기록이 전한다.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한 의병들이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항쟁할 때 지평(양평의 옛지명) 인사들도 함께 했다.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만들어 천일(天日)이 다시 밝도록 하라”며 봉기한 을미의병들은 세력을 확대해 충주에 집결했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의 지평의병기념관.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의 지평의병기념관.

■ 의향(義鄕) 양평(陽平), ‘지평의병기념관’
‘의향(義鄕) 양평(陽平)’은 양근(楊根)의 ‘양(陽)’자와 지평(砥平)의 ‘평(平)’자를 따와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1895년(고종 32) 강원도 춘천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에 경기도의 양근군(楊根郡)이 됐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평군(砥平郡)과 합쳐 양평군이 됐다. 지금의 양평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4㎞ 지점, 지름 3㎞가량의 분지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 지평리다. 이 작은 분지인 지평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분격한 유생들이 일으킨 을미의병이 최초로 일어난 곳이다. 양평의 지평의병은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면서 불이 붙었다. 또 6·25 한국전쟁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곳도 양평이다.

‘지평의병(砥平義兵)’은 1895년 음력 11월 28일 창의한 후, 원주를 거쳐 1896년 1월 12일 제천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지평의병은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등 본격적인 의병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1월 19일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유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제천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1896년 1월 22일 벌어진 장회협 전투는 지평의병의 첫 전투이다. 관군이 공주에서 바로 단양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장회촌(長滙村) 동임에게서 접한 지평의평은 급히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필희는 장회협의 서북쪽인 장림(長林, 대강면 장림리)으로 가서 주둔하고, 이범직(李範稷)은 읍의 남쪽 7리 지점인 유교(楡橋, 또는 柳橋)를 파수하게 했다. 중군장 이춘영(李春永)은 포군을 거느리고 장회협에 매복했다. 정오 무렵 관군이 골짜기로 들어왔고, 격전 끝에 지평의병은 최초의 승리를 거뒀다. 의병들은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날이 춥고 저물었기 때문에 추격을 그만뒀다. 이후 지평의병은 갑자기 와해 됐고, 주요 인물들은 제천의병에 참여했다.

‘지평의병기념관’은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지평리 385-3)의 옛 전술훈련장(6만 9872㎡)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지평의병기념관은 ‘희망의 횃불, 지평의병’이라는 주제로 △의향(義鄕) 양평 △일제의 침략과 저항의 역사 △항일의병의 효시, 지평의병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밤 △꺼지지 않는 희망, 양평 의병전쟁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지평의병 등 6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지평역 앞 시가지에는 ‘의병의 거리’도 조성됐다. 양평은 현재 의병의 거리, 의병로 등으로 명명하면서 양평군 전역이 ‘의병’으로 펼쳐져 있어 ‘의향(義鄕) 양평(陽平)’으로 불린다.
 

용문사와 함께 의병들의 근거지로 사용됐던 양평의 상원사.
용문사와 함께 의병들의 근거지로 사용됐던 양평의 상원사.
용문사의 의병비.
용문사의 의병비.
지평을미의병기념비.
지평을미의병기념비.
지평의병발상지 안내문.
지평의병발상지 안내문.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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