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의병기념관, 충(忠)과 의(義) 인물 기리는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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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의병기념관, 충(忠)과 의(義) 인물 기리는 교육장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0.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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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9〉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 있는 의성의병기념관.

의성군, 예산 10억 원·148㎡ 규모 한옥형식 ‘의성의병기념관’ 건립해
일제, 항일의병 본거지 의성 사촌마을 보복으로 수백 채 기와집 불타
서애 유성룡 태생지, 임진왜란·일제 침략 때 의병활동 중심지 역할해
글 읽던 선비들 쇠스랑·괭이 든 농민들 부대 조직, ‘의성의병’ 일으켜

 

‘항일 의병의 고장’으로 알려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는 지난 2016년 12월 15일 ‘의성의병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의성군이 예산 10억 원을 들여 148㎡ 규모의 한옥형식 콘크리트 건물 안에 전시장과 부대시설 등을 갖췄다. 

이 마을에서는 구한말 일제가 침략했을 때, 운산 김상종이 1896년에 일어난 의병을 조직한 뒤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일제가 항일의병의 본거지로 알려진 의성 점곡의 사촌마을에 보복으로 불을 질러 수백 채의 기와집들이 불에 탔다. ‘의성의병기념관’에는 의병에 참가하도록 여러 차례 걸쳐 호소한 ‘의병재격문’ 당시 전투상황을 적어놓은 ‘적원일기’와 의병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던 ‘호패’ 등이 전시돼 있다. 

의성 점곡의 사촌마을은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 등이 어울려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의 역사는 적게 잡아도 600년이 넘는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 대과와 소과 합격자가 50명을 웃돌 만큼 유교적 전통이 강한 선비마을로 통한다. 사촌마을의 ‘사촌 가로숲’은 천연기념물 제405호, 조선 시대 누각인 ‘만취당’은 보물 1825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이밖에도 500년 된 향나무와 ‘영귀당’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만큼 문화유적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있다. 

사촌마을 지명이 붙여진 유래는 마을 주변의 협곡에 의해 사토가 퇴적돼 마을의 땅이 비옥하기 때문에 ‘사촌’이라고 붙여졌다는 설과 중국 동산시절에 서유자라는 선비의 고향이 ‘사진촌’ 또는 ‘사촌’이었는데, 안동 김씨 입향조가 서유자를 동경했던 까닭에 마을 이름을 ‘사촌’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보기에는 평범한 시골 마을인 듯 보이지만, 김사원과 유성룡 등 40여 명의 과거 급제자로 뛰어난 학자가 배출돼 의성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양반마을’로 유명하다.

이곳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인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곳이다. 훌륭한 선비를 많이 배출했고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 때는 의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곳으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사촌리 가로 숲을 조성했는데, 안동 김씨 김자첨이 사촌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해 샛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보하려고 심어 둔 10여 종 500여 그루의 방풍림이 현재의 사촌리 가로 숲길이 돼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 대부분이 불태워져, 현재 남아있는 사촌마을의 고택은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전한다. 30여 채의 전통가옥을 볼 수 있고,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585년에 완공된 보물 제1825호로 지정된 ‘만취당’이다. 보물로 지정된 의성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이 학문을 닦고 후배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건물로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한다. 만취당은 김사원이 1582년에 짓기 시작해 1584년에 완공했다고 전해진다. 

만취당으로 가는 길목에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의성 사촌리 향나무가 잘 보존돼 있다. 조선 시대의 시인 송은 김광수가 심은 것으로 만 년 동안 푸르게 살라는 의미를 붙여 ‘만년송’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김개국이 선조 20년(1587)에 지은 의성 만취당.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김개국이 선조 20년(1587)에 지은 의성 만취당.

■ 경북 의성 사촌마을 의성의병기념관
‘의성의병기념관’은 의성의진의 의병 항쟁을 널리 알리고 나라를 위해 의롭게 싸우다 순국한 의병의 숭고하고 고결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6년 건립됐다.

‘의성의병기념관’은 환영의 장, 이해의 장, 감동의 장, 체험의 장 그리고 영상실 등의 콘텐츠를 통해 의성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을 되새겨 이곳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뜻깊은 시간을 선물하고 있다. 병촌고택 맞은 편에 위치한 ‘사촌마을자료전시관’은 사촌마을의 민속과 문화를 조사·연구하고 보존·전시한 곳으로 마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장소다. 민간신앙과 민속놀이, 음식 문화, 관혼상제 전시는 물론 사촌마을의 역사적 인물들도 안내하고 있다.

의성 사촌마을은 1392년 감목공 김자첨 공이 이곳으로 정착하고 혼인 관계로 1450년 안동 권식, 1758년 풍산 류태춘이 이주하면서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 등이 어울려 살아온 집성촌이다. 조선 시대 문현(文賢) 달사(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 전통의 선비 마을로 대과 18명, 소과 31명 외에 향시에 합격한 사람들, 문집과 저서를 낸 유학자들이 90여 명에 이른다고 전한다. 특히 충효의 유교적 선비 사상이 강했던 사촌마을은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 시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 활동이 강했던 마을로도 유명하다. 구한말 일제가 침략했을 때 운산 김상종은 1896년 창의해 의성의 의병대장으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수십 명이 순국했다. 당시 본거지인 사촌마을은 일본의 보복 방화로 ‘만취당’을 제외한 수백 채의 와가(瓦家;기와 집)와 유자정 등이 불타 없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유학의 기품이 있고, 선비정신이 살아있으며,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을 일으킨 전통마을은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채 품격있는 마을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의성의병기념관’에는 당시 의병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마을에 많이 살고 있어 기념관에 전시된 유품들은 의병의 후손들이 기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의성지역 의병들이 일제에 맞서 62일 동안 결사 항전한 역사기록물도 비치해 놓고 있다. 이곳은 120여 년 전 대륙 침략 야욕을 품은 일본에 항거했던 의병의 본산 마을이다. 글을 읽던 선비들과 쇠스랑과 괭이를 든 농민들이 부대를 조직했고, ‘의성의병(義城義兵)’을 일으켰다. 나라를 구하고자 충(忠)을 실현하고자 일어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만 해도 민주공화제는 상상도 못 했던 전제군주제였다. 이들은 민간의 김상종 의성대장을 필두로 관군과 수차례 맞붙었다. 가산을 풀어 의병식량(義兵食糧)을 조달했을 정도다. 김상종 대장은 서산 김흥락의 제자로 안동 의성지방의 선비들은 위정척사파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명성황후 시해로 임금이 러시아공관에 피신한 상태이다. 몇 년 사이에 동학 전쟁으로 십수만 명의 백성이 죽어갔다. 경복궁에 주둔한 침략자 일본군, 갈피를 못 잡는 조선 조정의 관군, 이들에 대항한 각 지방의 의병들. 의병 토벌의 주체는 누구였던가, 토벌 명령자는 누구였던가. 의병이 일어나면 쑥대밭이 된다. 불바다가 된다. 이름 없이 죽어간 선열들. 님들이 디디고 간 빈터 위에 말끔한 건물 ‘의성의병박물관’이 들어섰다. 후세에 길이 물려줄 겨레 사랑의 교육장으로, 임란과 호란의 충(忠)과 의(義)의 인물들도 기렸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 의성 사촌마을 권희순·수경 부자 의병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졌을 때 가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 들풀처럼 일어난 민초들이 바로 ‘의병(義兵)’이다.

경북 의성군 점곡 사촌리 출생으로 의성 고을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충(忠)을 실현한 권희순·권수경 부자 의병이 있다. 

조선 선조 25년 1592~1598년, 임진왜란 당시에 의성(義城) 고을의 수성장(守城將) 권희순(權希舜)은 고려 태사공 권행(權幸)의 23세손이며, 자(字)는 경화(景華)이고, 호(號)는 운암(雲庵)이다. 행정공(杏亭公) 식(軾)의 현손, 별시(別侍) 숭조(崇祖)의 증손이며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사형(士衡)의 손자, 호군(護軍) 무성(武成)의 셋째 아들이다. 명종 3년인 1548년 무신 6월3일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沙村里) 집에서 출생했다. 소시부터 재예(才藝)와 경륜이 특출하고 천문지리와 병학(兵學) 산수(算數)에까지 박통(博通)해 향시(鄕試)에 세 차례나 올랐다. 선조 16년, 1583년 계미에 36세로 무과에 급제했는데, 창방(唱榜) 하는 날 임금이 칭찬하기를 ‘이는 이른바 문무(文武)를 겸전한 재목’이라고 했다. 이듬해 갑신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고 선조 18년, 1585년 을유에는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가 됐으며, 다음 해인 선조 19년 1586년 병술에는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과 내금위별시(內禁衛別侍)를 역임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귀가해 집상(執喪)했다.

이후 선조 25년, 45세인 1592년 임진(壬辰)에 왜란이 일어나자 열읍(列邑)의 수령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림에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에 의해 의성(義城) 고을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돼 경상좌병사(慶尙佐兵使) 성윤문(成允文)과 더불어 합진(合陣)해 전공을 세움에 있어 의성의 군액(軍額)이 가장 두드러진 바 있었다. 이에 곧 안동부(安東府)의 판관(判官)으로 제수됐고 선조 26년, 1593년 계사에는 46세로 장기현감(長鬐縣監)으로 배수됐다. 선조 31년 1598년 무술 5월에 전상으로 인한 신병으로 졸하니 51세였다. 공의 사적은 ‘동사(東史)’에 등재돼 있다. 공의 행장(行狀)은 옥간(玉澗) 박무선(朴茂先)이 지었다. 아들은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자락당(自樂堂) 수경(守經)이다.

정묘란 병자호란 시 경상좌도(慶尙左道) 의병도유사(義兵都有司) 권수경(權守經)은 고려 태사공 권행(權幸)의 24세손이며, 자(字)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자락당(自樂堂) 또는 사제당(思齊堂)이다. 부정공의 차자 별장공 균량(均亮)의 8대 종손 행정공(杏亭公) 식(軾)의 5대손이다. 별시 숭조(崇祖)의 현손이고, 직장 사형(士衡)의 증손이며, 호군 무성(武成)의 손자요, 장기현감 권희순(長鬐縣監 權希舜)의 아들이다. 선조 17년, 1584년 갑신 12월 26일에 의성 점곡(點谷)의 사촌(沙村)에서 출생했다.

부모의 상복을 벗자 학행과 유일(遺逸)로 천거돼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문정거(杜門靜居)하면서 성리서적(性理書籍)을 탐구했는데, 그 당액(堂額)을 자락(自樂)이라 했다. 저술로는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하고 반성해 살피는 요체를 쓴 기여집(起余集) 5권과 감정의 방종을 억눌러 고쳐 나가는 방안을 논술한 담총집(談叢集) 4권을 남겼다. 인조 5년 1627년 정묘에는 북란(北亂), 즉 호란(胡亂)이 일어나 만주(滿洲)의 노기(虜騎)가 쳐들어와 임금이 강화(江華)로 몽진하자 공은 44세로 강개한 나머지 동지들을 규합 창의(倡義)했다. 이때 경상좌도(慶尙左道) 의병도유사(義兵都有司)로서 활약했다. 

이후 9년 뒤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창의해 정묘년과 같이 했는데, 병력을 이끌고 상경 길에 조령(鳥嶺)에 이르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는 시주(詩酒)를 벗 삼으며 세상일을 잊고자 했다. 효종 10년 1659년 기해 정월 23일에 졸하니 수가 76세, 사망 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경연(經筵)에서 임금께 주백(奏白)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로 추증됐고, 다시 숙종 16년 1690년 경오에 이조판서로 가증됐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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