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에 ‘청송항일의병기념관’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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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에 ‘청송항일의병기념관’ 조성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0.1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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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10〉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의 의병기념관 전경.

화전등 일대 1만 2000㎡의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에  ‘의병기념관’ 조성
1896 병신년, 심성지(1831~1904) 대장 청송 객사 지휘부  ‘청송의병’거병
청송 의병투쟁, 1995년 심성지 서훈 신청 계기 ‘적원일기’ 발굴 알려져
충의사, 독립유공자로 서훈 추서된 전국의 2000의병 전원 위패 봉안돼

 

경북 청송군은 구한말 일제의 조선 침탈에 맞서 청송의병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화전등) 일대 1만 2000㎡ 규모의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 부지에 국·도·군비 등 총 58억 7500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충의사’와 ‘청송항일의병기념관’ 등을 지난 2007년 착공해 2011년 6월 1일 완공했다. 

‘청송항일의병기념관’이 들어선 청송군 주왕산면 청송로 4123 일대는 ‘화전등(花田嶝)’으로 불리는데, 화전등 유적지 성역화 사업은 2000년에 확정됐다. 

청송 부동면에서 부남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순우리말로는 ‘꽃밭고개’다.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져 고갯마루가 마치 꽃밭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1896년 7월 이천의진(利川義陣)을 지원하기 위해 화장동으로 가던 청송의진(靑松義陣)이 이곳 화전등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고 교전한 곳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청송의진의 항일의병 6명이 전사하고, 청송의진은 군의 추격을 받으며 각처를 전전하다 해산했다. 이 화전등 전투를 소재로 한 실경뮤지컬 ‘꽃밭등영웅들’이 제작돼 용전천 특설무대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의병이 가장 크게 일어난 시기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와 개항기인 대한제국기이다. 개항기·대한제국기의 의병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의 전기 의병과 1905년부터 1910년경까지의 후기 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청송은 임진왜란부터 구한말 항일항쟁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목숨을 던진 의병 정신의 본향으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 인명록에 등재된 전국 의병선열(2647명) 중 청송지역 출신이 무려 95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유공자를 배출한 충의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고장이다.

청송항일의병기념공원에는 ‘청송항일의병기념관’을 비롯해 대한민국 건국 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전국 의병 선열 2647명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가 있다. 또 동·서재와 창의루, 관리사 등이 전통한옥으로 건립돼 청소년들에게는 애국충정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면서 전통 정신문화를 선양하는 나라사랑 국학교육의 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화전국의 의병 유공선열 2657명의 이름과 훈격을 정리한 명각대.

■ 청송의병 ‘병신창의’와 ‘적원일기’ 공개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劃策)한 정변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후 친일계 인사를 통해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의 을미개혁을 진행했다. 을미개혁은 시기적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직후 국민의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강행됐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또한 유교적 문화가 짙었던 당시 국민에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투를 자르게 하는 단발령(斷髮令) 등을 강제로 시행하면서 전국의 유림을 중심으로 반일·반개화 의병운동을 펼치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1896년 병신년 새해 산골에서 유학을 배우던 청송의 선비들은 서적을 덮고 탁상을 물린 뒤 일본에 대항해 구국 의지를 불태웠다. 1896년 병신년 청송 심씨 문중의 소류 심성지(1831~1904)를 대장으로 청송군 객사에 지휘부를 둔 ‘청송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소류는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건해 그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병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송의병은 병신년 새해를 보내고부터 인근 용전천 백사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5월 14일 청송의병은 김하락(1846~1896)이 이끄는 이천 의병과 김상종(1847~1909)의 의성 의병 등과 함께 청송 안덕면 감은리에서 북진하던 일본군을 협공으로 무찔렀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던 일본군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그 기세까지 이어간 전쟁이 일명 ‘감은리 전투’다. 

감은리 전투는 청송 의병에게는 만만치 않은 전쟁이었다. 당시 청송 의병은 양반 출신의 지휘부 75명과 포수, 농민, 보부상 등 180여 명이었지만 어느 한 명도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군사훈련 자체가 부족했고 싸우는 기술 또한 전문 병사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뒤처졌다. 전쟁에서 청송 의병은 큰 피해를 보고 고전했다. 하지만 구국 의지로 뭉쳐진 청송 의병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결국 일본군 10명을 사살하며 그들을 줄행랑치게 했다. 감은리 전투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이 전투에서 만일 패했더라면 한반도의 중심부까지 일본군의 세가 뻗어나가 국운을 뒤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송지역에서는 1896년 3월 결성된 청송의진과 같은 해 4월 결성된 진보의진(眞寶義陣)이 전기 의병에 속하며, 후기 의병 때는 산남의진에 청송지역 인사들이 참여하다 후에 산남의진의 지역 분대로 서종락이 이끄는 청송동부진과 남석구가 이끄는 청송서부진이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서종락이 이끌던 청송동부진은 1910년 일본군 수비대 합동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이때 체포된 의병들은 양손을 묶인 채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 백석탄에서 총살당했다. 고와실 전투를 끝으로 청송동부진도 해산했다. 고와실은 방호정, 감입곡류천, 공룡발자국, 만안 자암단애, 백석탄 포트홀 등으로 이어지는 신성계곡 지질탐방로(녹색길)의 마지막 마을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이 어우러진 트레킹코스에도 110년 전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의병들의 정신이 스며있다는 설명이다.

청송의 의병투쟁은 지난 1995년 소류 심성지 대장의 서훈 신청을 계기로 청송의진의 진중일기인 ‘적원일기(赤猿日記)’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감은리 전투에서 청송 의병이 활약한 것이 지금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1995년 청송 심씨 문중에서 전해져 온 ‘적원일기(赤猿日記)’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 역사가 고증됐다. 적원일기는 전쟁 중 일어난 일들을 기술한 것으로 ‘적원’은 색으로 붉은색을 뜻하는 병(丙)과 원숭이를 뜻하는 신(申), 즉 병신년에 쓴 일기다. ‘적원일기’는 당시 의병들의 출신 성분과 활동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어서 대부분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서술한 기존 진중일기와는 달랐다.

일기는 청송 의병에 참여한 양반들의 이름과 그들이 병사를 훈련시키거나 운영하는 데 낸 운영자금 등이 기록돼 있었다. 일기를 보면 ‘상시 근무병인 대장소 근무자 65명은 일일 1량을 받았고, 각 지역에 파견된 병사 48명은 매월 이틀간 근무하면서 2량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청송의진이 꾸려질 때 ‘초기에 3000량이 넘는 비용을 양반 출신이 모두 댔다’고 일기는 기록했다. 

당시 3000량은 한옥 몇 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 상당히 큰 금액이다. 적원일기를 통해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청송 주민들이 모두 하나 돼 구국에 동참했고, 사회 지도층이 스스로 자비를 털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송항일의병공원 전경,

■ 항일의병기념공원의 충의사·의병기념관
의병 정신을 재조명하고 나라사랑의 전통정신 문화를 보여주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성된 항일의병기념공원은 사당인 ‘충의사’와 ‘의병기념관’을 비롯해 호국문, 효제충신재(서재), 인의예지재(동재), 창의루, 명각대,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충의사는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추서된 전국의 2000여 의병 유공 선열 전원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다. 위패는 전국 도별 가나다 순으로 배향돼 있다. 의병기념관은 항일의병의 효시인 임진왜란의 역사성과 한말 갑오경장(1895년)으로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 의병사의 역사성, 청송지역의 의병 활동 사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병신창의 고유문, 초유일도사민문, 감은리전투 디오라마, 적원일기 이미지, 영상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동재와 서재는 추모제 행사 시 헌관·집사자 변복, 대기실, 의병 선열 유족회 사무실, 자료 연구실, 의병 관련 자료와 도서 열람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인 창의루는 의병정신 선양을 위한 집회와 참관단체의 강의실로 쓰이고 있다.

명각대는 의병유공 선열 전원의 이름과 훈격을 도별 가나다 순으로 새긴 8폭의 오석판을 가로 9m, 세로 3m의 화강석 원석에 붙여서 만들었다. ‘무명의병용사충혼탑’은 15만 명이 희생됐다는 한말 항일의병의 우국 충혼을 추모하기 위한 13m 높이의 화강석 석탑으로 지난 2017년 준공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6년까지 적원일기 등을 통해 청송 의병 80명 등 115명을 공훈록에 등록했다. 의병만 봤을 때는 전국 시·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수가 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적원일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우리말 번역본까지 냈다.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 마을은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생육신 조려(1420~1489)의 후손인 함안 조씨(咸安趙氏) 방호공파가 500년 넘게 뿌리를 틀고 살아온 곳이다. 1896년 5월 14일 이 마을에서 청송 의병의 감은리 전투가 일어났을 때, 함안 조씨 후손들은 누구보다 구국을 위해 앞장섰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등록된 사람만 9명이며, 적원일기 등을 통해 의병에 참여한 사람은 15명에 이른다. 한집안에서 이례적으로 많은 수가 의병에 참여한 것이다.

충의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청송은 인근에 주왕산, 주산지를 비롯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코택, 겨울스포츠 등 관광명소로 이름 높은 휴양도시다. 항일의병기념공원에는 충의사와 의병기념관 등이 있으며, 의병장 심성지의 소류정 등 청송에는 항일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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