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우금티 전투 패배, 동학농민혁명 막을 내리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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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우금티 전투 패배, 동학농민혁명 막을 내리는 사건
  • 취재=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24.07.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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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9〉
우금티 고개 밑으로 뚫린 우금티터널.
우금티 고개 밑으로 뚫린 우금티터널.

공주전투에 참전한 동학농민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군 세력
농민군, 공주 남쪽 이인·남월 함락 동학농민혁명 공주전투 시작돼
공주전투, 22일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민족자주의 투쟁을 전개
우금티전투 ‘1만명 동학농민군이 전투 후 500명에 불과’ 큰 희생

 

세성산 전투(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 밤낮)에서 조직적인 훈련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학살이나 다름없이 동학농민군이 패했다. 동학농민군이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군에게 영향을 미쳤다. 세성산 전투 이틀 후인 10월 23~25일의 제1차 우금티 전투에는 세성산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경군과 일본군을 우금티에 투입한다.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한 지 나흘 후에는 홍주목사 이승우가 거느린 관군에게 홍주성을 공격하던 동학농민군이 대패함으로써 우금티 전투에 상당히 불리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더불어 공주 동쪽 30리에 있는 한다리(大橋)까지 진출해 전봉준군과 연합작전을 펴고자 했던 옥천포(沃川胞)의 동학농민군마저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 부대에 패함으로써 서울에서 남하하던 경군과 일본군이 공주로 집결할 수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 등 많은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공주로 집결했다. 공주전투에 참전한 동학농민군 대열은 동학농민혁명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군 세력이었다. 공주를 포위한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먼저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후비 19대대의 서로분진대 본대(150여 명)와 경군(800여 명) 그리고 지방 관군을 상대로 공주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  동학농민혁명군, 22일간의 공주전투
22일간의 공주전투(10월 22일~11월 14일)는 제1차 대치(10월 22일), 제1차 전투(10월 23일~25일), 제2차 대치(10월 26일~11월 7일, 11일간), 제2차 전투(11월 8일~9일), 제3차 대치(11월 10일~14일, 5일간)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는 9차례의 개별적인 처절한 전투, 대치 중 2차례의 농민군 피습 사건(10월 26일 효포(孝浦) 사건, 11월 11일 중대(中垈)·우와리(牛臥里) 사건), 1차례의 유구(維鳩) 농민군에 대한 침탈 사건(11월 11일)이 있었다. 10월 22일, 남접의 전봉준 농민군과 공주지역 이유상 농민군이 공주의 남쪽 이인(利仁)·남월(南月)을 함락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공주전투가 시작됐다. 10월 22일, 공주 바깥산줄기(조일진압군이 충청감영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공주시가지 외곽을 둘러싼 병풍처럼 솟은 산줄기)를 대치선으로 충청감영을 방어하는 조일진압군이 산줄기를 포위·공격하는 동학농민군 사이에 공주전투 제1차 대치가 시작됐다.

제1차 공주전투(10월 23일~25일)는 10월 23일 이인 전투로 시작돼, 10월 24일부터 10월 25일까지 효포 전투로 계속됐고, 대교 전투(10월 24일)와 옥녀봉 전투(10월 25일)가 연이어 일어났다. 10월 23일 이인 전투는 일본군 스즈끼 소위 부대, 경리청(經理廳)의 성하영 부대, 충청감영군이 이인을 탈환하기 위해, 이인을 먼저 점거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하루 종일 계속됐고, 저녁 무렵 조일진압군이 충청감영으로 퇴각하면서 끝났다. 10월 23일 공주 남쪽에서 이인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공주 시가지 동쪽 외곽 대교(大橋)와 신소(莘沼)에 북접 농민군 수만 명이 밀고 들어와 남접 농민군과 연대, 충청감영 포위를 시작했다. 

효포 전투(10월 24일~25일)는 공주 바깥산줄기 동쪽 효포 인근에서, 10월 24일은 하루 종일 동안, 10월 25일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이틀에 걸쳐 벌어졌다. 효포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공격으로 관군과 일본군이 능티 방면 공주 바깥산줄기를 방어한 전투였다. 10월 24일 효포 전투에서는 전봉준·이유상·김기창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과 경군 경리청 성하영·백낙완 부대가 격돌했다. 이인 전투에 참전했던 스즈끼 소위 부대는 이날 새벽에 용산(龍山) 본대로 귀환하기 위해 공주를 떠났기 때문에 이날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은 없었다. 10월 24일 효포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때, 공주 동쪽 외곽 대교에서는 경군 경리청 홍운섭 부대가 북접 농민군을 습격해 대교 전투가 일어났다. 이날 황혼 무렵 일본군 후비 19대대의 서로분진대 본대, 경군 선봉진(先鋒陣) 이규태 부대 본대, 통위영군(統衛營軍)이 공주에 도착해 이후 공주  전투에 참전했다. 10월 25일 효포 전투가 계속될 때 효포의 북쪽 금강변에서는 북접 농민군이 금강변의 큰길을 따라 충청감영을 함락하려고 시도하자 이를 막아 나선 선봉진 본대와 통위영 부대 사이에 옥녀봉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효포 전투에 참전했던 백낙완 부대가 옥녀봉을 방어하고 있던 선봉진 부대를 지원하면서 옥녀봉 전투에서 북접 농민군이 퇴각했다. 

10월 25일 효포 전투와 옥녀봉 전투에서 패배한 남접과 북접 농민군, 지역 농민군은 공주 남쪽 경천·논산과 정산으로 퇴각해 11일간의 대치 기간을 거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공주전투 제2차 대치, 10월 26일~11월 7일). 이어 11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제2차 공주전투가 일어났다. 11월 8일 다시 공주 충청감영을 포위하기 시작한 농민군은 이인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공주 바깥산줄기를 포위했다. 다음날인 11월 9일에는 공주 바깥산줄기에 있는 우금티, 송장배미 산자락, 오실마을 산자락, 효포 등 4곳에서 큰 전투가 일어났다.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처절한 돌격전을 감행했으나, 근대식 소총으로 고지에서 사격하는 조일진압군에 의해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당했다.

이후 11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동학농민군은 공주에서 조일진압군과 대치(공주전투 제3차 대치)를 계속했다. 11월 14일 저녁 공주 남쪽으로 진군한 조일진압군이 공주의 남쪽 이인·용수막·경천을 장악하면서 전선은 공주 대 논산으로 바뀌어 공주전투가 끝났고, 11월 15일 조일진압군의 남하가 시작됐다.
 

동학농민군의 주검을 매장한 송장배미.
동학농민군의 주검을 매장한 송장배미.

■ 우금티,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
공주전투에는 전국에서 모인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 지역 농민군으로 구성된 ‘10만여 명’의 동학농민군 세력이 참전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지역 농민군에는 공주창의소 의병장 이유상이 지휘하는 유생 의병부대가 있었고, 정산 김기창 농민군, 공주 접주 장준환 세력과 공주에 속한 유성의 최명기·강채서·박화춘의 농민군 세력이 있었다. 특히 11월 9일 공주전투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는 40~50차례의 연속적인 공격을 했고, 송장배미 산자락에서는 10여 차례의 육박혈전을 감행했다. 이 전투에서는 항일전을 대비해 결사대를 조직해 연속 공격을 감행한 조직화 된 동학농민군 대열과 동학농민군들의 죽음을 넘어선 항쟁 의지와 새 세상을 향한 염원을 보여줬다.

공주전투는 22일간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각계각층이 대동단결해 민족자주의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단결되고 결사적인 투쟁은 일본군 농민군진압전담부대 후비 19대대의 90일 일정에서, 공주에서 서로분진대를 22일(10월 22일~11월 14일) 동안 저지시켜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 나섰다. 공주전투에서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에 의해 대단히 많은 인원이 희생됐다. 우금티 고개에서 동학농민군들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0~50차례 연속해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공방전으로 우금티 산자락에는 동학농민군의 시체로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우금티 전투를 지휘했던 전봉준은 공초에서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2차 접전 후 500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송장배미 산자락 전투에서는 ‘육박·혈전 10여 차례에 피는 내를 이루고 시체는 쌓여 산을 이뤘다’고 했다. 이로 인해 ‘봉정동 일대는 무덤이 됐고 봉정동에서는 삼 년을 두고 시체를 치웠을 정도였으며, 동학농민군의 피로 적셔진 효포의 혈흔천(血痕川), 이인에서 구시티 고개까지 길을 따라 약 2km 줄을 지어 있던 무덤 떼와 같았다’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대결은 중세 화승총과 근대 신식소총의 대결이었다. 공주전투를 비롯한 대다수의 전투는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농민군이 패배했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의 신식소총에 맞서 공주전투와 같이 정면 대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격 전쟁도 시도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의 유격 전쟁 사례는 일본군의 서울~부산 병참부에 대한 습격과 통신선 절단 투쟁, 후비 19대대 중로분진대에 대한 옥천~금산~연산에서의 유격 전쟁, 황해도에서 동학농민군의 유격 전쟁 등이 있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청일전쟁 공식기록인 메이지 27~28년 ‘일청전사(明治二十七八年日淸戰史)’에는 동학농민군의 항쟁을 ‘일본군의 청일전쟁 수행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막아 나선 유격 전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유격 전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기획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반일 전쟁인 의병 전쟁, 만주의 독립군 투쟁 등으로 이어지면서, 무장독립운동의 첫 출발을 알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공략이 동학농민혁명 성패의 갈림길이었고, 공주 우금티 전투의 패배는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리는 사건이 됐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공주 대교리 전투지. 
공주 효포·웅치 동학농민군 전투지.
공주 효포·웅치 동학농민군 전투지.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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